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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론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2. 9. 6.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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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래와 구준엽으로 구성되어 1996년부터 2005년까지, 2017년부터 다시 활동한 대한민국의 댄스 듀오.

데뷔곡인 '꿍따리 샤바라'가 가요 차트에서 1위를 여러번 거머쥐고 승승장구의 길을 걸어 한 때 해외까지 진출한 듀오다. 당대 가수들 중에서 독보적으로 터프가이임을 강조한 게 특징이며, 실제로 강원래와 구준엽은 키가 꽤 큰 편이다

 

데뷔전

경기고등학교 같은 반 친구[]인 강원래와 구준엽은 당시 학교와 인근 지역에도 잘 알려진 춤꾼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함께 춤을 추면서 가수의 꿈을 키웠으며, 이태원의 클럽들을 돌아다니면서 당시 서울에서 잘 나가던 춤꾼들 사이에서도 명성을 날렸다고 한다. 졸업 후 댄스경연대회에서 강원래가 1위, 구준엽이 4위로 입상한 것을 계기로 이수만에게 발탁되어 1990년에 현진영이 주축이 된 '현진영과 와와'에서 1기 멤버로 활동했지만, 활동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군에 입대하면서 '현진영과 와와'에서 탈퇴했다. 엄밀히 말해서 '와와'는 전속 백댄서의 개념이었기 때문에 탈퇴는 아니고 하차에 가깝지만. 이들을 대신해 후속으로 들어온 와와 2기 멤버가 이현도와 김성재.

전역 후에 구준엽은 1993년에 이탁(본명 이광민)과 '탁2준2'로 활동했고,[] 강원래 역시 가수들의 백댄서로 생활하다가 1995년에 박미경이 발표한 '이브의 경고'에 객원 랩퍼로 활동하며 가수로서의 성공 가능성을 열어갔다.

이후 라인음향의 히트 제작자이자 작곡가인 김창환에게 발탁되어 1996년에 데뷔한다.

 

데뷔후

김창환의 구원투수가 된 클론[]은 '꿍따리 샤바라'로 데뷔했다.1996년은 당대 최고의 가수인 솔리드, R.ef, 신승훈, 김건모가 컴백해서 활동하던 시기였으며 이들 모두가 음반을 발매하자마자 한 달도 안 되어 1위 후보에 오를 만큼 정말 각축전이 심한 시기.[] 나머지 곡들도 꽤 오랫동안 순위권에 머물 정도로 명곡들이 많았다.[]

강원래와 구준엽은 공식 데뷔만 늦을 뿐, 활동한지는 이미 10년이 지난 중고 신인이고 기성 가수들과 활동한 경험이 많아 능수능란하게 적응을 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으며 제작사에서는 앨범 발매 전부터 미리 클럽 등지에 데모 테입의 형태로 꿍따리 샤바라를 배포해 두면서 크게 홍보를 한 결과 이들은 앨범을 발매한지 1달도 안 되어 각 방송사의 1위 후보에 올랐다.

이들은 이 기세를 몰아서 당대 최고의 가요프로 가요톱10에서 김건모가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던 솔리드, R.ef, 신승훈 등과의 경쟁을 뚫고 '스피드'로 4주 연속 1위를 한 다음 대망의 골든컵에 도전할 때 그 기록을 저지하고 새로운 최강자로 우뚝 서게 되었으며 그 날 이들은 가요톱10 첫 1위가 확정되자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 이 날 김건모는 바로 전년도까지 자신이 소속되어 있던 라인음향 소속의 클론이 1위를 할 때 축하를 했지만 속으로는 아쉬움을 참아내는 기색이 역력했다.[]

구준엽이 훗날 술회하기를 김건모와 클론은 원래 친했으나 김건모가 김창환과의 불화로 인해 회사를 나가면서 김건모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1위 발표 후 같이 얼싸안을 때 구준엽은 김건모의 몸에 손도 안 댔다고 한다. 당시 자료화면을 보면서 그 당시는 너무 어려서 저런 행동을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뒤 이들은 그 여세를 몰아 '꿍따리 샤바라'로 다른 경쟁작인 룰라의 '3!4!'와 DJ DOC의 '여름 이야기'와의 경쟁 끝에 골든컵의 주인이 되었으며 1집의 후속곡인 <난>도 1위 후보에 오르면서 입지를 탄탄히 다졌다. 높은 인기를 증명하듯이 1996년에 개최된 SBS 스타상과 서울가요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다.[]

1집의 기세를 이어서 1997년 6월에는 2집인 여름 바캉스 곡인 <도시탈출>을 선보였을 때[] 반응은 기획 단계부터 1집의 성공을 너무 크게 의식한 나머지 <쿵따리 샤바라>의 아류작이라는 평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평가를 떠나 제작자의 앨범 홍보 방향부터가 대놓고 '쿵따리 샤바라 2'였다. 심지어 도시탈출 뮤직비디오 로고에 부제를 대놓고 '쿵따리 샤바라 2'라 칭하기도. 이와 같은 전략을 통해 안전주의적인 선택으로 적당한 인기를 얻긴 했으나, 방송 3사에서 골든컵을 비롯해 각종 1위를 쓸어남았던 전년도의 열풍에는 훨씬 못 미치는 인기였다.

그래도 슈퍼루키 시절의 인기를 통해 여러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 후보에 상당수 진입한 바 있으며 후속곡인 발라드 풍의 '빙빙빙'도 10위권내를 유지하면서 선전했다. 음반판매량이 1집의 밀리언 셀러에서 수직으로 하락해 20만장 대에 그치긴 했지만, 다행히 클론이 기존에 보여준 카리스마있는 이미지와 세련된 비트, 친근한 멜로디 등등의 음악적인 이미지와 컨셉은 그대로 이어갔기 때문에 2집이 부진했던 것에 비하자면 브랜드 파워는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또한 1집의 인기가 워낙 컸기 때문에 2집이 상대적으로 부진하긴 했지만 절대적인 인기가 부족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또한 이 무렵부터 한류 열풍에 슬슬 불을 지피면서 당시에 대만 쪽으로 프로모션을 하게 되어 가수로서, 연예인으로서 새로운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약 1년 반의 공백기를 가진 후 1999년 3월 27일 3집을 발매했다. 두 멤버 모두 강렬한 랩핑과 낮은 음역대의 허스키 보이스를 가지고 있어 기존 멤버들만으로는 음악적인 변화를 꾀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그러한 이유로 파워풀한 가창력을 지닌 객원멤버 김태영과 함께 활동했다. 테크노 리듬과 펑키 리듬을 접목한 <돌아와>를 통해 2집의 부진을 어느 정도 만회했고 이를 통해 한국에서의 하락세를 반등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외에도 <Funky tonight>, Nazareno(1975)의 O.S.T인 When a child is born을 리메이크한 <사랑과 영혼> 등을 통해 앨범 활동을 이어갔으며, 두 곡 모두 이전 활동곡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린 비트와 레트로 느낌의 멜로디를 접목하여 음악적인 다양화를 기하였다.

또한 이 무렵에 대만에서의 인기가 본격적으로 터지면서 H.O.T., NRG와 함께 중화권 한류 1세대로 상징적인 인기를 누렸다. 대만 등 중화권은 1990년대 말 한류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전까지 여리여리하고 부드러운 이미지 혹은 비주얼 락계의 짙은 화장과 화려한 헤어스타일이 일반적이었던 J-POP이 대세였는데, K-POP 스타일이 이들과 크게 차별화되었기 때문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그것이 곧 한류로 발전했다. 특히 클론이 내세운 강렬하고 남성적인 댄스 퍼포먼스가 신선하게 다가온 점이 주효했다.

3집에서의 반등 및 한류 열풍의 시발점으로 롱런의 기반을 다진 이후, 2000년 4월 4일에 4집 앨범을 발매했다. 당시 유행하던 테크노를 적극적으로 접목시켜 중독성 있는 멜로디와 비트로 승부한 <초련 Techno Mix>는 기존의 클론 이미지와 아주 잘 부합하면서 대중적으로 부담없이 다가오는 곡이었고, 결국 나이트클럽 및 레크리에이션계를 섭렵하며 2, 3집보다 훨씬 많은 인기를 끌어 완벽하게 정상의 자리로 다시 올라섰다. 참고로 <초련 Original Mix>도 같은 정규 앨범에 수록되었는데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오락실 발판형 리듬 게임인 펌프 잇 업에 수록되면서 리듬 게임 유저층 위주로 알려지긴 했다.

KBS 뮤직뱅크에서 무려 4주 1위, MBC 음악캠프에서도 1위를 차지하면서 4년 만에 다시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후속곡인 <거짓말> 역시 10위 권에 안에 드는 등 선전했다. 색상 반전으로 인한 충격과 야광봉 퍼포먼스의 손목 돌리기가 큰 이목을 끌며 유행을 탔고, 20대 나이트 시장을 정확히 타켓팅한 것이 주요한 성공 이유 중 하나였다. 초련의 대성공으로 음반판매량 역시 3집 27만장을 훌쩍 뛰어넘는 41만장의 판매량을 올렸다.

밀리언 셀러를 기록한 최전성기 1집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버금갈 만한 위상을 찾아올 수 있었고, 해외발 인기를 감안하면 1집 이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수준에 도달하면서 인기 가수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비극에서 재기로

2000년 11월 9일 강원래가 오토바이를 타던 도중 현재의 신논현역 사거리[]를 좌회전하는 과정에서 불법 유턴한 차량과 충돌, 하반신을 쓸 수 없는 몸이 되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 때문에 강원래가 더 이상 춤을 추지 못하게 되면서 일차적으로 클론 활동이 전면 중단되었고, 그의 하반신이 영구 장애 판정을 받게 됨과 동시에 댄스 가수 활동 역시 불가능하게 되면서 끝내 잠정적으로 해체했다.[] 그후 클론은 구준엽이 혼자 활동했고 특히 2002년 월드컵에 발표된 랄랄라에는 강원래는 녹음에는 참여했으나 활동은 불가능해 베이비복스와 함께 활동했다.

그 뒤 2005년 강원래가 휠체어를 이용한 안무를 만드는 투혼을 발휘해, 무명가수 원종찬[]을 객원멤버로 합류시켜 5집으로 컴백했다. 타이틀곡은 '내사랑 송이'이며,[] 휠체어 댄스를 보여주며 클론의 건재함을 과시하는 한편, '소외된 외침'과 '무언의 발걸음(feat. 이정)' 이란 노래를 통해 장애인 이동권과 편견 문제 등과 같은 사회적 메세지를 담았다. 강원래는 라디오 DJ로, 구준엽은 'DJ KOO'란 이름으로 솔로 가수 및 클럽 DJ로 활동하게 된다.

2006년에는 야후! 코리아와 Mnet이 제작한 '2006 꼬레 아리랑' 뮤직비디오에 참여하기도 했다. 뮤직비디오 영상 1분 2초경에 등장한다.#

2017년 6월 29일, 12년 만의 새 앨범 'We Are'을 발표하면서 컴백했다. 다만 과거의 스타일이 아닌 클럽풍 EDM 곡들인지라[28] 옛 모습을 기억하는 클론 팬들은 아쉬워하는 듯. 수록곡 중 두곡이 하드스타일을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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