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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라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2. 9. 25.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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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5월 11일[]가요톱10 새 얼굴 새 노래에 코너에서 데뷔한 대한민국의 혼성그룹이다.

 

룰라 특징

1994년 고영욱, 김지현, 신정환, 이상민의 4인 멤버로 출범했고, 데뷔앨범의 100일째만남, 비밀은 없어 등이 큰 인기를 얻었으나 신정환이 1995년에 군 입대로 인해 탈퇴하게 된다. 하지만 후임으로 채리나가 영입된 이후로도 여러 히트곡을 내면서 1990년대를 풍미[]했다. 대표곡으로는 날개 잃은 천사, 3!4!, 연인, 기도, 프로와 아마츄어, 비밀은 없어, 천상유애 등이 있다.

2000년대 이후 소속 멤버의 과반수가 범죄를 저지르는 사태가 발생[]해서 한때는 대한민국 가요계의 흑역사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지금은 이상민이 음악의 신, 더 지니어스, 미우새, 아는 형님 등의 프로그램 출연을 통해 연예계에 복귀했고, 채리나와 김지현도 가끔 방송출연을 하면서 이미지를 많이 회복했지만, 신정환은 복귀를 시도했으나 사실상 실패[]했으며[], 고영욱은 죄가 죄이니만큼 지상파고 케이블이고 모든 방송사에서 출연금지 처분을 받아 죽을 때까지 복귀가 전혀 불가능하고, SNS로 소통을 시도했으나 이 역시 비난만 받을 뿐, 구글계정부터 정지되어 실패하였기에 추후 어떠한 복귀 시도조차 일절 못할 것으로 보인다.

2020년대에는 채리나, 김지현, 이상민 3인 체제로 활동하고 있으며 앨범 발매는 아직 안 했지만[] 공연, 방송 활동 위주로 팀을 이어가면서 이미지를 많이 회복했다. 고씨 대신 신씨가 래퍼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썰이 있다.

 

룰라 데뷔 과정

처음에 룰라가 구성되었던 과정은 기획사에 스카웃되어 댄스 가수를 준비하던 이상민이 같이 활동할 동료를 알아보던 상황에서 같은 은평구[] 지역에 살던 고영욱과 닿게 되었고 고영욱은 고등학생 시절부터 가수가 되고 싶어하던 단짝 신정환을 소개시켜 주어 사장이 이상민과 신정환으로 댄스듀오를 만드려고 했던 것으로 부터 시작했다. 다만 둘로 묶기는 영 애매했고 듀스가 유명해지자 이들로 부족할 것 같다는 회사 내 분위기가 형성되어 신정환이 고영욱을 사장에게 추천해서 남자 3명으로 가기로 한다. 이 때 고영욱의 춤과 노래 실력이 평범해 “너는 안 되겠다”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반응이 안 좋자 마지막에 자기네 교회 목사님 성대모사[]를 하여 겨우 합격했다고.

그렇게 이들 셋은 한 하숙집에서 가수 준비를 위해 합숙 훈련을 했고 먹을 것이 없어 동네 닭을 잡아 먹는 등 눈물겨운 고생을 하다가 소속사 사장은 또 서태지와 아이들을 이길 수 없다며, 급하게 여성 멤버를 모집하기로 한다.

이때 타 기획사에서 솔로 가수를 준비하던 김지현이 지인의 소개를 받아 룰라 사장님을 만나게 되는데, 평소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라 예의상 참석했다가 그 자리에서 내일부터 나오라는 얘기를 듣게 돼서 어느 순간 룰라 멤버가 됐다고 한다. 정신차려 보니 룰라 앨범 작업 녹음실 부스에 있었다고...

신정환은 김지현이 트로트 가수를 준비하고 있다고 자주 얘기하고 다니는데 그건 아니고 김지현의 말에 따르자면, 원래 소프트 팝 장르의 솔로 가수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김지현은 한국무용을 전공하긴 했지만 방송 안무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다. 웨이브도 신정환에게서 처음 배웠을 정도였고, 때문에 초반에 춤으로 고생을 상당히 했다.

룰라의 결성 역사는 원래는 이렇게까지만 알려졌었으나, 2020년 근황올림픽 유튜브 채널을 통해 의외의 사실이 확인됐다. 바로 여성 멤버가 김지현 혼자가 아닌, 사실 두 명이었던 것. 바로 양준일의 댄서였던 박수경[] 이 김지현과 같이 룰라의 여성 멤버 데뷔조 연습생이었다고 한다. 원래 룰라는 5인조로 예정이 됐었고 함께 합숙도 하고 데뷔를 준비했지만 박수경이 개인 사정으로 탈퇴하면서 김지현이 홍일점이 되어 최종 4인조로 데뷔했다고 한다

 

룰라 1집

이렇게 모인 4인은 당시에 유행하던 레게풍 팝을 컨셉으로 준비해서 데뷔하게 되는데 그룹명 역시 레게의 뿌리(Roots of Raggae)의 약자인 룰라(Roo'ra)로 정했다. 이 그룹의 아이디어는 대부분 이상민이 냈고 이 시점부터 팀의 리더이자 프로듀서로서 팀의 중추 역할을 담당한다. 데뷔곡 '백일째 만남'도 김지현의 보컬 파트만 작곡가 박근태에게 의뢰해서 받은 다음, 이상민이 주도하여 랩 부분은 멜로디와 전혀 상관없는 레게 리듬의 일명, 디기딥 랩을 넣어서 당시 기준으로 아주 이색적인 곡이 탄생하게 됐다고 한다.

 

1994년 5월에 1집 Roots Of Reggae를 발매하고 타이틀곡인 '100일째 만남'으로 가요톱10의 신인가수들의 등용문과 같았던 새 얼굴 새 노래 코너에서 5월 11일에 방송 데뷔했다. 그러나 룰라의 무대가 끝난 직후에 룰라와 마찬가지로 가요톱텐에 첫 출연한 투투가 데뷔곡인 일과 이분의 일을 부르면서, 느닷없는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었다.  다만 룰라의 100일째 만남은 투투의 일과 이분의 일과 게임이 안될 정도로 초반 주목을 받지 못해서, 이 때 인지도는 투투에 비해 많이 밀렸다.

심지어 투투는 다년간 헤비메탈 록밴드 활동을 거쳐온 김지훈, 오지훈, 유현재로 구성된 남성 3인조 밴드 그룹이었고, 이들과 친구인 이윤정이 여성 보컬로서 음반 녹음에 참여하면서 남자 셋 여자 하나의 목소리로 녹음된, 다양한 종류의 음악을 소화하는 토탈 뮤지션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프로젝트의 형식으로 투투 1집을 기획했지 레게 음악으로 활동하려는 그룹이 아니었다. 가요계에 레게 열풍이 불자 오지훈이 음반 작업을 하면서 마지막에 LP와 카세트테이프의 A, B 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이 곡을 만들고 녹음해 앨범에 수록했는데, 앨범의 전곡을 들은 당시 투투의 소속사 사장이 타이틀곡을 일과 이분의 일로 바꿀것을 제안했다. 투투는 소속사 사장의 의견에 따라 일과 이분의 일을 데뷔곡으로 내놨는데 예상 밖의 대박을 쳤다고 한다.[] 정작 레게의 뿌리라고 등장한 전문 레게 그룹 룰라 쪽이 묻힌 것. 이상민 日 "우리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일과 이분의 일"을 이길 수 없었죠."

당시 룰라는 자신들을 홍보하기 위해 방송국에 찾아가 일하고 있는 PD들 앞에서 느닷없이 "Roots of Reggae라고 말을 하겠소!"라고 인사를 해댔고 그 결과 방송국 스탭들 사이에서 "엄청 특이한 아이들"이라고 눈도장을 찍히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자면 아이돌식 인사법인 셈.)

초반 부진하긴 했지만 워낙 독특한 느낌의 그룹이라 방송가와 대중들 사이에서 슬슬 인식되기 시작했다. 또 크라잉 랩이라고 해서, 울면서 랩하는 난생 보지 못한 광경을 보여주는 등 팀 컨셉 하나는 확고하게 밀고 나갔다

 

그럼에도 여전히 룰라는 투투에게 밀리는 양상이었고, 심지어 일과 이분의 일에 한정해서 객원 멤버를 투입하여 남자 셋, 여자 하나로 데뷔하게 된 투투와 멤버 구성원도 남자 셋, 여자 하나로 같아, 남성 가수들 위주로 시장 판도가 형성되었던(=남성 가수들이 대세였던) 1994년에 가요계의 홍일점으로서 황혜영 vs 김지현의 여성 가수 간의 대결 구도가 부각되었던터라, 남자 멤버들은 김지현을 매번 구박했다고 한다. 거기에 매일 스케줄이 끝나고 돌아오면 소속사 사장이 룰라를 소집해서 투투 무대를 녹화해서 틀어놓고 훈계하는 것도 일상이었다고. 거기서 그나마 신정환이 총대를 메고 몇 번 항의를 했지만 얻어맞았다...

남자 멤버들은 홍일점인 김지현을 질투해서 누가 먼저 김지현을 울리나 시합을 하는 등 많은 장난을 쳐댔고 그 덕에 항상 김지현은 노이로제에 걸려서 힘겨워 했다. 특히, 고영욱과 신정환이 심했다고... 밥을 많이 먹는다고 꾸중하거나 춤을 못춘다고 구박하는 등[] 아주 가지각색으로 김지현을 구워삶았으며 그 중에서도 제일 열심히 김지현을 골렸던 신정환은 결국 비오던 날 이동하던 밴에서 김지현한테 우산으로 구타당할 뻔했다. 옆에서 시종일관 잔소리를 해댔던 고영욱에게 질려버린 김지현은 그에게 "너 양아치니?"라고 울분을 토해냈고 이 드립은 수년 뒤에 예능가를 강타한 전설의 유행어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멤버들하고 소속사한테 치이면서 고통받던 김지현이 결국 소속사와 상의 없이 빨간 립스틱과 현란한 펌 헤어로 스타일을 바꿔버렸는데 당시만 해도 가요계에서 이런 성숙한 스타일링은 찾아 보기 힘들던 때라 이 결정이 오히려 이것이 호평받으면서 룰라가 다시 재조명받기 시작했고 이 시점부터 투투를 빠르게 추격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신의 한 수.

이후 룰라는 타이틀 곡 활동 막바지 즈음부터 인기가 급상승하기 시작하여 1994년 8월에 100일째 만남으로 투투의 일과 이분의 일과 함께 1위 후보에 오른 뒤, 마침내 TV 가요 20에서 1994년 8월 마지막 주에 일과 이분의 일을 꺾고 1위를 하는 등 선전했다.(가요톱10에서는 4위까지 올랐다.)

그렇게 인기를 점점 누리던 와중 이들은 1994년 가을부터 후속곡 '비밀은 없어'로 활동을 이어갔다. 김지현의 섹시하면서도 귀여운 모습을 극대화시킨 이 명곡은 타이틀 곡보다도 더 좋은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1994년 11월부터 투투의 후속곡인 그대 눈물까지도의 인기를 추월했고 1994년 12월에 가요톱10 1위 자리에 올랐으며, 5주 연속 1위를 달성하면서 1995년 1월에 골든컵을 받게 된다.

 

그렇게 '비밀은 없어'로 한참 활동하며 인기가 치솟던 당시 갑작스럽게 신정환이 군대에 끌려가게 되는데 신정환이 태평하게 군입대 연기를 치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어느 날 영장이 나오는 바람에 활동이 조기중단될 위기에 처한다.[] 이 공백을 메꾸기 위해 비상이 걸린 룰라 측은, 강원래의 소개를 받아 당시 문나이트(클럽)등의 이태원 일대에서 춤으로 이름을 날리던 채리나를 새 멤버로 영입했고 연습 기간이 고작 5일이라는 초스피드 합류를 이뤄냈다. 아는 형님에서 밝힌 바로는 연습 기간이 아예 없었다고 한다.

원래 힙합을 지향하던 채리나는 레게를 하는 이 팀에 너무 들어오기 싫었지만 너무 급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합류하게 됐다고 한다. 초반 신정환을 지지하던 팬들에게 홍일점이던 김지현에 이어 또 다른 여성 멤버의 합류는 달갑지 않은 반응이었으나, 보이쉬한 스타일[]과 신인이라고 믿기지 않는 그루브로 단기간에 화제를 모으며 오히려 신정환이 있을 시절 보다 더 그룹이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다. 윤종신: "신정환의 입대가 명반을 만들어냈다"

여담으로 그녀의 예명은 신정환이 채리나가 외국 사람처럼 생겼다는 이유로 "야 외국인스러운 이름 어때, 리나, 채리나 어떻냐?"고 이국적인 느낌의 예명 '리나'로 지어준 것이라고 아는 형님에서 밝혔다. '채'라는 성씨는 멤버들이 "야 밥상 채리나"라는 식의 농담 따먹기를 하는걸 듣고 회사의 높으신 분이 "채리나"로 확정시켰다고. 나중에 자기 예명으로 사주를 보러갔는데 당시 사주를 봐준 사람 曰 "채리나 이름 만들어준 사람한테 평생 밥 사라"고 했단다. 돈을 끌어모으는 이름이라고.

원래 신정환이 나간 자리에 소속사는 남자 멤버를 무조건 넣거나, 아니면 당시 핑계걸등의 댄서로 유명했던 김송을 염두해 두고 있었지만 김송이 미디어라인(당시는 라인음향)과 계약을 한 상태여서 불발되자[ 김송처럼 보이쉬한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 긴 머리를 고수하던 채리나에게 대뜸 숏컷을 요구했고 스타일리스트는 별 신경도 안 썼다고 한다. 처음에 채리나는 이 걸 듣고 숙소만 오면 펑펑 울어버렸는데, 숙소에 들어오면 항상 요상한 노래를 틀어놓고 현란한 메이크업을 하며 거울을 보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한다. 당시 채리나의 나이는 고작 17살이었으니, 상처를 받을 만도 하다.

어쨌건 채리나가 합류한 이후로도 '비밀은 없어'는 인기에 날개를 달고 꾸준히 가요톱텐 1위를 지키며 가요톱텐 골든컵 수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성공적으로 1집 활동을 마치게 된다. 1집 앨범은 초반 부진을 딛고 60만장 가량의 판매량을 올려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둔다. 이들은 몇 개월의 공백 기간을 가진 후 1995년 봄, 2집 앨범 '날개잃은 천사'를 발매하며 컴백했다.

 

룰라 2집


그렇게 발표한 2집 타이틀곡 '날개 잃은 천사'는 발매와 동시에 아주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 그야말로 공전의 히트를 했으며 한국 가요계 역사상 최단 기간 백만장 돌파라는 기록적인 성과를 거둔다. 초판 3만장을 먼저 찍어두고 첫방송을 했지만 처음 이틀간은 아무런 주문이 없다가 그 다음날 7만장, 30만장 주문이 오더니 70만장 주문이 들어와 일주일만에 150만장이 팔려나갔다고 한다.

또한 리드 싱어 김지현의 섹시한 스타일이 주목을 받아 더욱 큰 사랑을 받았으며 이 시절 김지현의 인기는 가히 날아다니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을만큼 선풍적이었다. 모든 여성들은 김지현의 스타일을 주목하거나 따라해댔고 남자들은 김지현이 TV에 나오면 넋을 잃고 바라봤다는 것이 당시 룰라 인기를 체감한 사람들의 전언. 아형에서 김지현이 밝히길, 군대에 있을 때 신정환은 룰라 가린다고 슬리퍼로 쳐맞았다고 한다...

'날개 잃은 천사'의 히트로 가요톱텐에서 혼성 그룹으로는 유일하게 골든컵을 한 해에 2번이나 받는 주인공이 되었으며 1990년대 들어 한 해에 각기 다른 앨범에서 골든컵을 1회씩 수상한 유일한 가수가 되었다. 아울러 다른 방송사에서도 여러 번 1위를 하면서 본격적인 스타 라인에 올랐다.[] 그리고 후속곡인 '안녕'과 '프로와 아마추어'도 10위 권 안에 올려놓으면서 2집 앨범은 공식적으로 160만장, 비공식적으로 190만장 이상이 팔려나가 그해 김건모를 이어 두번째로 높은 음반 판매량을 올렸으며 혼성 그룹 단일 앨범 최다 판매고를 기록해 전설을 써내려갔다.

이 시절 가요 기획사의 관행 중에 하나가 교체 멤버(중도 영입 멤버)는 100만원대 중후반 쯤의 월급제로 수익을 정산 하는것이 보편적이었다고 하는데,채리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채리나가 막 영입될 당시에 채리나에게 제시된 정확한 금액은 아는 형님에서 밝혀졌다시피, 150만원. 하지만, 리더인 이상민은 "그럴 경우 리더로서 채리나에게 무언가를 제안하기에도 그렇고, 팀워크도 그렇고, 자신이 팀을 이끌 명분이 없는 데다, 다같이 고생하는데, 월급제를 주는 건 아닌거 같다."며 소속사 사장을 설득해서 채리나에게도 n분의 1로 공평하게 정산해줄 것을 제안했고, 소속사 대표는 "그럼 2집 앨범이 발매되고 나서 20만장 이상 팔려나갈 경우 그렇게 하겠다."는 옵션을 걸었지만 2집 앨범은 발매 1주 만에 100만장 이상 팔려나가며, 시원하게 해결되었다. 채리나가 지금까지 이상민에게 고맙게 생각하는 일화 중 하나라고.

 

이들은 특히 안무로 내놓은 "엉덩이 춤"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는데 당시 10대들은 물론, 20~30대까지 룰라하면 다들 엉덩이를 두들길 정도로 대중들에게 큰 인상을 줬으며, 당시 학교축제 전부 이거였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룰라하면 "엉덩이 춤"을 떠올릴 정도로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이 안무는 채리나를 소개시켜준 강원래가 짜줬다고.[] 당시 김지현이 엉덩이를 한 번 두드릴때마다 5만장씩 팔렸다는 우스갯소리가 등장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였다.

저 엉덩이 춤 안무에는 웃지 못할 일화가 있었는데, 강원래가 짜준 엉덩이 춤은 하나 하나 다 끊어서 추는 동작이라, 어딘가 굉장히 부자연스러웠던 동작인 데다 설상가상으로 김지현은 그 춤을 못 췄다고 한다... 도저히 개선될 의지가 안 보이자, 결국 채리나는 이 걸 웨이브로 바꿔버렸고, 이 것 또한 신의 한 수가 되었다.

룰라의 인기에 힘입어 '꼬마 룰라'라는 패러디 그룹이 탄생되기도 했으며, 이 그룹에서 그 유명한 지드래곤이 배출되기도 했다. 꼬마 룰라는 그 당시 화제가 많이 돼서 여러 프로에 섭외가 되었지만, 어린 아이들이 연예계에 발을 들이는것을 좋게 보지 않는 여론이 지금 보다도 쎄서 몇몇 방송은 녹화만 하고 편집되거나, 더 활발한 활동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룰라 콘서트에 게스트로 참여하는 등 2집 활동 당시 여러 무대에서 함께 했으며 몇 몇 멤버는 세월이 흘러 룰라와 다시 만남을 가지기도 했다. 정작 지드래곤은 이 시절을 좀 부끄러워하는 듯. 자기랑 비슷한 나이에 인디안 보이에 나와서 춤췄던 소속사 후배는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다니던데 그리고 룰라의 저주에 의해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또한 90년대 청춘 스타 최창민도 룰라를 굉장히 좋아해서 콘서트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백댄서 단장에게 발탁되어 데뷔한것도 유명한 일화이며 가수 겸 배우 이정현도 학창시절 룰라와 서태지와 아이들 춤을 추며 교내에서 유명해지자 담임 선생님이 오디션을 권유해 영화 꽃잎으로 데뷔하기도 했다. 그렇게 수많은 10대 청소년들에게 룰라 붐을 일으키며 큰 사랑을 받았으며 80년대 초중반에 태어난 연예인들이 장기자랑에서 룰라 춤은 다 한번씩 쳐봤다고 언급할 정도로 가요계의 최고 스타로 우뚝섰다.

이때 룰라는 스케쥴을 위해 헬기를 타고 다니거나 행사 페이가 1억원에 달할 정도[19]였다고 하니 이 일화만 봐도 이 때의 룰라 인기가 어느정도 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멤버 별로 한 달 수익이 평균 3~4000만원에, 많게는 1억 정도였으며 당시 사무실에서 클린하게 정산하지 않았음에도 이 정도였다.

 

룰라는 그 해 서울가요대상과 SBS 가요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정점을 찍었고 혼성 그룹으로는 유일하게 지상파 가요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그렇게 룰라는 대중가요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이 시절 압도적인 사랑을 받았고 국민 가수 김건모와 음반 기록을 놓고 대결하는 등 가요계의 톱 스타 반열에 올랐다.

이 이후에도 여러 혼성 그룹들이 등장하여 큰 인기를 모았지만 '날개 잃은 천사' 시절의 룰라처럼 가요계를 통틀어서 원톱 자리를 놓고 다퉜을 정도의 파급력을 자랑하는 팀은 나오지 않았다. 룰라의 경우 가요계 음반 판매 1위 자리를 놓고 경쟁하면서 패션, 안무 분야에서도 큰 획을 그었기 때문에 더욱 임팩트 있는 전성기였다. 룰라보다 오랫동안 롱런한 혼성 팀은 있을지 언정, 이 시절 룰라 인기를 능가하는 혼성 그룹은 나오지 못했다.

 

룰라 3집 표절 파문으로  인한 위기

2집의 '날개 잃은 천사'가 대성공을 거두자마자 소속사는 기세를 몰아 3집 발매를 계획했고 룰라가 95년 9월 미국공연을 할 당시 교포 제임스 리에게서 받은 데모 곡을 작곡가 홍재선이 편곡해서 완성한 타이틀곡 '천상유애'를 후속 앨범으로 발표했다.[] 트롯과 가요를 접목시켰다는 신박한 장르와 더불어 1억원 가량의 초대형 뮤직비디오를 내세운 3집은 의심의 여지없이 대박을 예고하고 있었다. 3집 앨범은 방송 활동보다 앞선 95년 12월 말부터 발매를 시작하고 있었으며 룰라가 가요대상을 수상한지 한달도 지나지 않은 상황.

하지만 앨범이 발매되고 며칠 뒤부터 PC통신을 중심으로 타이틀 곡 '천상유애'가 일본 쟈니스의 NINJA가 미소라 히바리의 곡을 리메이크해서 불렀던'お祭り忍者(오마츠리 닌자)'(1990)를 표절한게 아니냐는 논란이 붙었고 후속곡인 '사랑법'을 포함한 대부분의 수록곡들이 해외의 인기곡들을 베낀 표절곡들이라는 게 드러나면서[] 언론과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아 정상적인 활동이 어려운 상황에 놓이기 시작했다.[]

당시 인터넷은커녕 PC통신의 보급율이 높지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논란이 너무 커지자 신문 보도로까지 이어졌고 그만큼 '천상유애'가 너무 노골적으로 표절한 싱글이었기 때문에 논란은 순식간에 불을 지핀듯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천상유애가 발표되기 불과 2년 전에 싱어송라이터 홍수철이 일본가요 하나를 통째로 표절한 것 때문에 가요계에서 완전히 매장당한 걸 보면 당시 룰라의 상황이 얼마나 총체적 난국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홍수철은 히트곡 하나를 표절했는데 룰라는 해외곡 하나가 아니라 아예 여러 개를 표절했으니...

룰라는 96년 1월 7일 SBS TV 가요 20에서 '천상유애'의 첫 무대를 방송 사상 최대 규모로 진행할 예정이었고, PD는 물론 멤버들도 굉장히 기대했던 무대였지만 녹화 직전에 무산되었으며[] 같은 날 KBS 슈퍼선데이에서 1절만 겨우 방송된 무대가 '천상유애'의 처음이자 마지막 무대가 되었다. 당시 KBS는 표절 논란 중의 곡을 방영한 이유로 상당한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SBS TV 가요 20에서는 결국 후속곡으로 내정했던 '사랑법' 무대를 부랴부랴 선보이며 '천상유애' 대신 이 곡에 승부를 걸것처럼 보였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고 표절 논란은 사그라들기는커녕 더더욱 커져만 갔다.

 

결국 연예가 프로그램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표절 논란의 원곡과 천상유애를 비교하며 틀어주는 방송이 나가면서 완전히 빼박 표절이 되어버렸으며, 게다가 발표 당시 천상유애를 처음에 대중들에게 발표하면서 소개할 때 '트로트를 접목한 독창적인 구성의 노래'[]라고 했고 이상민이 프로듀서로 참여했다는 식의 언론 플레이를 했기때문에 더 룰라에게 화살이 집중되었다.

당시 채리나와 김지현은 집에서 한밤의 TV연예에서 이들의 표절 시비를 가리는 방송을 지켜봤고 이내 낙담한 둘은 "창문에서 떨어지면 죽을 수 있을까"라는 위험한 생각까지 할 정도로 침체되어 버렸다. 당시 채리나는 18살의 어린 나이였기에 더욱 충격에 빠졌다고.

거기다 동일한 시각 이상민은 자신의 자작곡인 '하얀 새'마저 표절로 의심받는데 크게 상심해[] 결국 소속사 사무실 부근 화장실에서 자해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것이 자살 소동으로 번져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온다.#[]

이상민이 병원에 있다는 전화를 받은 채리나는 그 자리에서 실신했고, 지상파 9시 뉴스에 보도 될 정도로 기사화되었다. 이상민의 자살기도 사건은 목숨을 위협할 만한 수준의 상해가 아니었다보니[] 동정표를 얻기 위한 애드립이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훗날 방송에서 밝힌 바로는 너무 상심한 나머지 맨 주먹으로 화장실 유리를 깼는데 그때 피를 많이 흘리고 쓰러진 채 발견된게 와전된 것이라고 밝혔다.

어찌되었건, 청년 가수의 자해 소동은 당시 뉴스에도 보도될 정도로 큰 사건이었으며 당시 이상민의 자살기도 소식을 전해들은 같은 소속사의 탁재훈도 이상민이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문병을 와서 1000원짜리 1장을 내밀더니 "이거밖에 없는 나도 사는데 니가 왜 죽어! 임마!"라고 오열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탁재훈은 같은 회사 무명 가수 시절.

 

이들은 결국 1996년 1월 13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기자회견을 하게 되었고 김지현은 울먹이며 "여론이 이렇게 무서운줄 몰랐다. 어제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던 팬들이 등을 돌려서 매장당한 느낌"이라고 밝히며 사실상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앨범 선주문량은 활동 중단과는 상관없이 80만장 가까이 팔려 나간 상태였지만 이후 음반 생산을 중단했고 반품 사태도 일어나서 일각에서 주장하는 흑자는 절대 아니었을것으로 추정된다. 일단 팀이 한방에 나락에 떨어질 위기에 처해버렸는데...

한때 고영욱이 라디오스타에 나와서 사장님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며 사과한다는 발언을 했으며 '천상유애'의 작사와 작곡은 홍재선과 재미교포 대학생 제임스 리의 작곡유닛인 Season이 했는데, 당시 소속사에서 이상민이 앨범에 참여했다는 홍보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 사실이 와전되어 이상민의 이미지 타격이 심했고 이것이 자살기도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룰라도 희생양이긴 했지만 워낙 인기 정점의 스타이기도 했고 괘씸죄가 적용되는 탓에 더 많은 비난을 받았다.

천상유애가 표절곡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당시에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전이라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은 일본 곡이나 외국곡들을 가져와서 7마디를 그대로 쓰고[] 멜로디를 살짝 바꾼 히트곡들이 비일비재했으며[] 룰라가 여기에 대표격으로 걸려버린 셈. ‘오마츠리 닌자’와 천상유애를 계속 들어보면 알 수 있는데, 오마츠리 닌자의 구성을 대충 파트 A, B, C, D 정도로 나눈다고 치면 천상유애는 분명 오마츠리 닌자 전체를 카피했으나 노래 파트의 순서를 교묘하게 섞어놨다. 여기에 80년대 인기곡이었던 콘도 마사히코의 'ギンギラギンにさりげなく(긴기라긴니사리게나쿠) 화려하고 조용하게'[] 등 여러 곡을 열심히 짜깁기한 나름대로 성의(?) 있는 표절곡인 것.

오마츠리 닌자는 당시 매우 유명한 곡[]이라서 당시 일본 음악을 듣던 층은 거의 모두 이 노래를 알고 있었고 두 곡의 핵심적인 부분인 '오래 오래 오래'(‘쏘레 쏘레 쏘레’) 부분이 원곡과 발음마저 유사해 누구든 한 번에 유사성을 알 수 있었으며 전국의 나이트 클럽에서는 이를 디스하며 동시에 알리기 위해 원곡인 오마츠리 닌자와 표절곡인 천상유애를 이어서 같이 틀어주는 경우도 많았다.

이 영향으로 표절에 대한 관심과 환기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2000년 이후에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과 함께 가수들이 일본곡을 돈주고 합법적으로 리메이크하는 경우가 늘어나서 예전보다는 상황이 나아졌다.[]

표절 파문으로 인한 상처가 깊었던 모양인지 룰라의 역사나 음악을 거론할 때 3집은 없는 셈 치는 경우가 많고[] 거론이 되더라도 개그 소재로 잠깐 등장하는 수준으로 끝나며 밤무대 활동에서도 천상유애보다는 사랑법을 1절만 부르는 경우가 많다. 결국 표절곡 하나가 룰라가 사실상 연예계에서 없어진 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룰라 멤버들과 룰라 팬들 모두에게 지울 수 없는 흑역사를 만들어준 셈이다.

만약 룰라 멤버들이 자신들의 곡이 해외 곡을 카피한 거라는 것을 알았다면 애초부터 방송에서 아예 부르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타이틀로 정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저작권을 구매해서 이상민으로 등록까지 했다. 이 시절 일본 문화 개방이 이루어져 일본 문화를 공식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상황에서 '천상유애'를 정식으로 허가 받고 내놓았다면 2집을 잇는 메가 히트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여담이긴 하지만, 천상유애 작업 당시 녹음실 등지에서 기이한 현상이 자주 발생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멤버들은 이 일들이 충격이어서 발매 당시에는 어그로로 여겨질까봐 꽁꽁 숨긴 일화였고 나중에서야 밝혔다.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이지만 이미 이때부터 안좋은 조짐이 있긴 했던 듯.

사실 천상유애의 임팩트가 엄청 커서 그랬지 히트를 친 '날개 잃은 천사' 역시 Shaggy의 'Oh! Carolina'[36], 와 US3의 'Tukka Yoot's Riddim'을 표절한 의심을 받았다. # 당시에도 이 의혹이 꽤 자자했지만 너무 큰 인기를 누려 묻힌 것. 날개잃은 천사의 작곡가는 최준영으로 천상유애 작곡가와 달리 큰 대미지를 입지 않았으며 이후 작곡가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최근 저작권협회에 천상유애를 검색하면 작사ㆍ작곡가의 이름이 모두 오마쯔리닌자의 작사ㆍ작곡가의 이름으로 수정됐다. 발매한 지 한참 지났지만 클리어런스를 행한 것은 어찌보면 다행인 일.

 


비단 룰라뿐만 아니라 90년대 한국 가요계, 특히 댄스 가요는 표절이 만연했다. 오늘날의 노골적인 레퍼런스는 애교로 보일 정도로, 아예 원곡의 일부를 통째로 무단 샘플링하거나 무단으로 곡 전체를 번안하는 사례도 많았다. 천상유애 파동의 주인공인 작곡가 홍재선은 표절 상습법으로서 활동곡 3곡이 모두 무단 샘플링/무단 번안곡인 희대의 산업 폐기물 R.ef 1집 또한 그의 작품이다. 또한 김민종은 얼마 후에 '귀천도애'라는 곡으로 승승장구하다가 일본곡의 표절이 밝혀지자 본인이 직접 사과를 하고 가수 생활을 잠정 은퇴한 적이 있었다. 노래만 표절하는 것이 아니고 무대 컨셉이나 복장, 댄스 등도 대놓고 외국의 인기 가수에게서 그대로 카피해서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90년대에 활동한 작곡가나 싱어송라이터치고 표절 논란이 없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

그나마 90년대 초중반 유명 가수들이 연이어서 표절 논란에 말려들고 특히 남녀노소 모두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룰라가 표적이 되면서 지상파 TV연예프로그램까지 나올 정도로 이슈가 되었고, 전문가들 뿐만이 아니고 일반인들까지 표절 문제에 대해 인식하게 되면서 가수들이나 제작자들도 표절 문제에 대해 예민해지고 많이 나아진 것.

앨범 수록곡 중에 비틀즈의 곡 Come Together의 커버 버전도 있었다.

 

룰라 4집

표절 파문으로 활동을 중단한 룰라는 이제 끝났다는 심정으로 한국에서 연명하고 있었는데, 비슷한 시기에 음악적 동반자이자 소중한 벗이였던 김성재의 죽음으로 아픔을 겪었던 듀스의 이현도가 김성재의 장례식장에서 며칠 밤을 새며 자리를 지켜준 룰라에게 보답할 겸 미국으로 건너오길 권유했고, 재기를 위해 미국에서 체류했다.

룰라는 이현도와 함께 미국에서 앨범 작업을 했는데 예상 외로 너무 좋은 작품이 만들어졌으며 그 곡이 바로 그 유명한 <3!4!>다. 녹음 당시 원제는 "미래"였다가 이상민이 3전 4기의 의미를 담아 <3!4!>로 제목을 변경할 것을 제안한 게 좋은 선택이 되었다.[]

이들은 한국에 복귀하기 전 미국에서 먼저 공연을 열기로 했는데 공연장 대관이 어려워서 미국의 큰 공원을 통째로 빌렸고 한인 타운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음에도 수만명이 몰려들어와 대성황을 이루었으며, 생중계가 어렵다보니 자연스레 한국에서도 콘서트를 열어달라는 제안이 들어와 한국에서 컴백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 컴백 콘서트는 당시 MBC 골든 타임에 방송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미국 공연과 <3!4!> 뮤직비디오에 참여한 백댄서 중 훗날 채리나가 결성한 디바의 멤버가 되는 지니도 있었다. 이때의 인연으로 이후 채리나가 디바를 만들면서 지니가 멤버로 발탁되었다.[]

그렇게 룰라는 6개월만에 4집 'All System Go!'로 컴백해 대중들앞에 다시 나섰다. 물의를 일으킨 셈치고 너무 일찍 돌아왔다는 부정적 여론도 존재했고 여러 방송국에서 룰라의 캐스팅을 고려한다는 입장도 내놓았기에 가요톱텐에서 첫방송을 할 당시 톱급이었던 이들에게 고작 '아자' 한 곡만 배정해 주는 등 여러모로 서러움을 많이 겪었다고. 그럼에도 대표곡으로 내놓은 <3!4!>가 3집의 아픔을 딛고 큰 인기를 끌면서 가요톱텐과 인기가요 베스트 50에선 1위 후보에 여러 번 올랐으며 SBS TV 가요 20에서는 3주간 1위를 하면서 성공적으로 재기했다.

다만 체감 인기에 비해 수상 실적이 적었는데 당시 겨루었던 상대들이 셌던 것도 있고, 표절 파문으로 인한 여파 때문에 신세대 위주의 음악 방송이었던 SBS 외에서의 실적은 전무했다. <TV 가요 20>에서는 무려 5주동안 1위 후보에만 올랐지만 3주간 1위를 수상했다.

 

룰라보다는 이현도가 프로듀서로 역량을 뽐내면서 빛을 발했던 앨범이기도 한데, 그리고 그동안 랩과 춤 분량이 다였던 채리나가 의외의 보컬 실력과 텐션이 오른 패션 센스로 김지현의 인기를 능가하면서 더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 유명한 애프터스쿨의 가희도 이 시절 채리나를 보고 댄서의 꿈을 꿨다고 하며, 많은 여자 가수 지망생들이 채리나를 보고 가수의 꿈을 키웠다고 할 정도였다. 사실 리드 보컬이었던 김지현을 제치고 채리나가 메인에 나선 이유는 따로 있는데 이현도가 채리나에게 너도 노래 한번 해보라고 대뜸 요청했고 이때 처음으로 채리나의 노래를 들은 이현도가 생각보다 괜찮은 가창 실력을 가진 채리나에게 타이틀 곡에서 느닷 없는 메인 보컬을 제안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때 리드 보컬이던 김지현에게 아무런 상의 없이 채리나가 메인인 이 곡의 녹음을 제안하자 김지현은 무척이나 당황했다고 하며 이후 이상민과 이현도가 김지현에게 조금 젊은 느낌의 채리나를 메인 으로 음악을 만들려는 의도였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결국 채리나가 메인이 되는 '3!4!'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김지현은 표절 시비로 인해 감정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이후 발생하는 소속사와의 불화와 개인적인 슬럼프를 겪으면서 김지현 본인에게는 아주 힘든 시기였다고 한다. 나중에 '3!4!'가 히트해서 1위를 수상할 때도 기뻤다기 보다 슬펐다고 밝혔다.

한편, 4집의 모든 곡들 이현도가 만든 가운데 서브 프로모션 곡으로 밀었던 '아자'는 유일하게 이상민이 만든 곡이었으나 이현도에게 어깨 너머 배운 작곡법으로 몰래 만든 이 노래를 이현도와 상의 없이 집어넣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현도는 이 곡을 무지 디스했다. 또 KBS에서는 '아자'와 '일상성' 두 곡에 대해 성적인 행위를 암시하는 듯한 가사를 문제삼아 방송 금지 조치를 해버려서 후속곡으로 내정한듯 보였던 '아자'는 결국 별다른 후속 활동없이 묻혔다.

참고로 이상민은 나중에 2009년 9집 컴백 당시 모 인터뷰에서 반 농담으로 최고의 룰라 노래로 이 곡을 뽑기도 했다. 2집 후속곡 '안녕'을 연상시키는 세련된 팝 사운드긴 한데 난해한 느낌이라 호불호가 갈리는 편. 한편 심의기준이 비교적 약했던 엠넷과 KM, SBS 등의 방송에서는 짧긴 했지만 활동한 바 있었다. 이 곡에서는 김지현이 메인이다. 채리나와 김지현의 까리한 코디네이션이 극에 달한 곡.

 

그러다가 이벤트 차원에서 4집의 마지막 싱글 '흔들리며'로 무대를 가진지 일주일만에 김지현이 돌연 탈퇴를 선언해버렸다. 이때 팬들은 거의 멘탈이 갈렸다고 하며, 표절 시비를 겨우 딛고 일어서나 했더니 핵심 멤버가 탈퇴해버렸으니 멘붕이 올만도 하다. 더군다나 김지현의 탈퇴는 멤버들간의 상의끝에 내린 결정이 아니라는 내용이 흘러나와 더 혼돈의 카오스가 됐다.[] 충격과 공포

실제로 '3!4!' 활동 후반부에 김지현이 건강 악화로 병원 신세를 져서 SBS TV 가요 20을 비롯한 몇몇 방송에 불참[42]했는데 이때 소속사는 김지현이 유산했다는 식의 루머를 퍼뜨렸다고 알려지며, 결국 병원에서 나오자 마자 일주일뒤에 탈퇴 기자회견을 했다. 기자회견의 주된 내용은 "소속사의 처신에 대해 섭섭함을 느낀다"는 내용이었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김지현의 탈퇴를 돈을 위해 솔로로 독립하는게 아니냐는 눈초리를 보내왔다고 한다.

원래 룰라는 4집까지 계약이 되어있었으며 소속사 측의 제안으로 이후 솔로 활동을 할 예정이었으나, 예상치못한 3집 표절 논란으로 어떠한 활동 없이 급하게 접은 뒤 4집을 내게되었는데 소속사 측은 4집이 성공하자 5집까지 발매하고 마무리하자는 주장을 펼쳤으며 김지현은 당시 여러가지로 불평등한 대우를 펼친 소속사에 불만을 품은 것이다.

 

그리고 밝혀진 소속사의 횡포 중의 하나가, 김지현이 회사가 제대로 정산을 해주지 않는 부분[]이었는데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회사에 "모든 멤버들에게 제대로 정산해달라"고 말한것을 왜곡시켜 나머지 멤버들에게 "지현이가 자기만 돈을 달라고 하더라, 돈 욕심을 부려서 솔로로 독립하려 한다"고 이간질 시켰다고 한다. 또, 당시 소속사와 김지현 가족들과의 불화도 극심했다고.

이렇게 회사에 항의한 것에 대해 같은 여자 멤버였던 채리나에게는 잘 설명했지만, 성향이 달랐던 남자 멤버들에게 소속사와의 갈등을 털어놓지 못해서 남자 멤버들은 소속사의 이간질에 넘어가 김지현을 오해하기 시작했고, 이 시점에서 김지현은 이상민에게 4집을 끝으로 솔로 활동을 하겠다고 털어놓았지만 그 자리에서 이상민이 "너가 솔로로 나오면 잘 될것 같아?"라고 윽박지르는 바람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다만, 이상민은 당시 회사와 김지현 사이의 자초지종을 잘 몰랐기에 그도 김지현을 오해하고 있었다.

이로써 김지현은 멤버들에게까지 섭섭함을 느끼자, 결국 룰라와 결별하기로 마음을 굳혔으며 소속사는 김지현이 나이를 속였다거나 아이를 가졌다는 소문을 해명하긴커녕 부풀려서 언론 플레이하여 김지현을 압박했고 4집 활동 직후 바로 탈퇴 선언을 했다. 섹시 스타로서 자신의 매력이 더 소모되기 전에 솔로로 나오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고. 모 방송에서 이상민이 김지현 탈퇴 이유를 4집때 "채리나의 분량이 늘었기 때문이다, 혹은 당시 교제하던 남자친구가 부추겨서 그랬다"는 언급을 했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남자친구가 부추겼다는 얘기는 직접 김지현이 부정했는데, 교제하던 남자친구가 있긴 했지만 그런 사실은 없다고 해명했고 채리나의 분량이 늘어나서 탈퇴한 것도 탈퇴 이유와는 거리가 있다.

이미 4집 활동 후반부에 두 여성 멤버의 솔로 이적설은 돌았지만 초반 부정했음에도 결국 김지현의 탈퇴라는 극적인 사태가 찾아왔고, 당시 탈퇴 이유가 멤버들간의 불화라는 입장도 있었지만 얼마 뒤 그 사실은 번복하기도 했다. 훗날 많은 시간이 지나고 김지현은 당시 멤버들이 미웠지만 이런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정말 미안하다고 밝혔으며 이후 응어리를 모두 풀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사건이 얽혀있기도 하고 노래 자체도 묘하게 애틋해서 지금까지도 룰라 멤버들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노래가 들으면 눈물이 맺힐 정도로 기억에 남는 곡임과 동시에 멤버들이 가장 애착을 가지는 곡도 바로 이 '3!4!'라고 한다.

 

룰라 5집

이렇게 리드 보컬을 잃은 룰라는 또 다시 위기를 맞이했고 김지현이 룰라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상당했기에 여론은 룰라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에 대해 떠들어댔다. 결국 룰라는 이례적으로 5집 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5집을 끝으로 미리 해체하기로 결정했고,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부던히 노력했다. 하지만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지 고민이 아주 많았다고.

이때 4집 활동 당시 유럽 진출 겸 영어 음반을 제작하겠다고 찾아온 독일 DJ 마이키 로메오에게 그럼 아예 우리와 공식적인 활동을 하면 영어 음반을 내겠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흔쾌히 수락한 마이키 로메오는 5집에서 객원 멤버로 합류했다. 그는 당시 한국 클럽에서도 '월매송'이라는 이름으로 히트한 'Tonight is the night'을 작곡했던 유명 DJ로, 현재에도 주로 독일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이 노래를 부른 Le Click 멤버였다.

 

한국에서 활동하기 위해 마이키 로메오는 룰라 회사와 계약금 4천만원에 2~3개월간 수익을 정산을 받는 식으로 활동을 했다고 한다. 로메오는 활동 기간동안 다른 것보다 식사가 매일 불고기 도시락이어서 불만이 많았다고... 물론, 활동기간 동안 룰라 멤버들과 돈독하게 지냈으며 언어가 통하지 않았지만 바디랭귀지로 의사소통을 했다.

마이키가 합류한 룰라는 우선 영어 음반을 발매했으며 이후 정식으로 마이키 로메오를 영입했다고 기자회견을 한 뒤 97년 2월, 5집 'The Final'을 발표한다. 해체를 미리 선언하고서 발매한 앨범이라서 앨범 제목도 'Final'이였다. 이 앨범의 타이틀 곡은 이상민 작곡의 경쾌한 댄스곡 '연인'이었는데, 김지현이 없는 룰라는 망했다는 여론을 모두 씻어낸 채 오히려 4집 때 수상받지 못한 가요톱텐 1위를 차지하면서 성공적으로 복귀했으며 채리나의 탄탄한 보컬 실력도 재발굴되면서 성공적인 활동을 했다.

또 이상민이 전곡을 작곡했기에 음악성도 함께 인정받아서 더 좋은 평가를 얻기도 했다. 반면에 이 시기 김지현은 야심차게 내놓은 솔로 1집 활동곡인 <캣츠아이>가 과도한 섹시 컨셉과 논란 때문에 악평이 쏟아지며 대조되는 모습을 보여줬다.

또 이때 룰라 측은 김지현과 같은 방송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방송국내에 선포해버려서 김지현은 별다른 방송 활동도 못했다는 후문이 있지만 룰라 5집 앨범이 끝날 즈음에 김지현 솔로 앨범이 나왔기에 이 얘기는 그닥 설득력이 낮다.[] 김지현 1집 타이틀 곡도 10위권 안에 들었지만 당시 압박감을 많이 느껴서 김지현은 많이 정신적으로 힘들어했던 시절.

 

한편 룰라는 '연인'의 리믹스 버전부터 군에서 제대한 신정환이 재합류해서 활동했고, 베스트 앨범의 신곡 '반추'[]로 신정환, 채리나, 고영욱, 이상민 체제로 짧게 활동하다가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당시 룰라의 은퇴 무대를 SBS에서 특집으로 마련하기도 했다.

 

룰라 해체 이후

그 이후 이상민은 샵, 소호대, 컨츄리꼬꼬 등의 그룹을 기획하면서 월드뮤직의 음악 프로듀서[]로서의 행보를 밟아나갔으며 한 멤버는 '플레이어'라는 댄스 듀오를 결성하여 활동했지만 별다른 히트를 치지 못했으며 2집 타이틀곡의 뮤직비디오에 당시 고등학교 재학중이었던 이민정이 출연했다.

채리나는 평소 염원하던 힙합 3인조 여성 그룹인 '디바'를 결성해 '왜 불러' 등의 곡으로 큰 히트를 치면서 인기를 얻게 되었고 김지현은 뮤지컬 배우로 활동을 이어나간다. 군대에 갔다 와서 낙동강 오리알이 된 신정환은 음악을 하고 싶어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이상민의 프로듀싱하에 탁재훈과 '컨츄리꼬꼬'를 결성, 룰라로서 누리지 못했던 전성기를 누렸으며 후에 같은 멤버와 같이 신나고라는 그룹을 만들었다.

 

룰라 6집

이렇게 각자의 활동을 하고 있던 룰라 멤버들은 1999년 신정환을 제외[]하고 다시 뭉치게 된다. 당시 이상민은 월드뮤직에서 여러 팀을 프로듀싱했지만 그렇게 큰 두각을 내진 못하고 있었으며[], 김지현과 고영욱도 애매한 위치였기에 이들의 재결합은 꼭 중요했던 모양. 그러나 디바로 성공 가도를 달리던 채리나가 문제였는데 룰라 스탭들이 채리나에게 재결합을 제안하자 조금 고민했고 이를 안 좋게 본 스탭들이 쓴소리를 하자 결국 룰라로 다시 돌아왔다.

당시만 해도 개인 활동은 커녕, 유닛 활동을 해도 배신자라는 시선이 가득했던 보수적인 가요계라서 채리나가 디바와 룰라 중간에서 몹시 힘들어했으며 룰라 활동에 다시 참여하면서 디바 활동에 소홀해지자 결국 디바 멤버들과도 소원해지는 등 채리나가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고 훗날 밝혔다. 하지만 계약 기간 때문에 디바 3집은 낼 수 밖에 없어서 99년 룰라 재결합 음반 이후에 디바 3집까지 발매하며 활동했다.

 

이들은 해체 2년만에 깜짝 재결합을 선언하고 6집 앨범 'Six N' Six'을 발매했으며 라틴 계통의 타이틀곡인 '기도'는 여러 가요프로그램에서 1위를 수상해 성공적으로 복귀했다. 이 곡 역시 이상민이 직접 작곡한 곡으로 많은 사랑을 얻었기에 더 의미있는 활동이었다. 후속곡으로 펑키 장르의 'Moving'와 전성기 시절 룰라를 떠올리게 하는 '고백'도 준수한 인기를 얻었다. 이 시기 룰라가 가장 각자 개인의 텐션이 절정에 다다랐을 시기였고, 전성기 때보다 좋아진 화합과 실력으로 안정적인 모습과 인기를 누렸다. 당시 최전성기를 누리던 김현정과 김민종 등을 제치고 인기가요 3주 연속 1위를 달성해 화제가 되기도 했고 최종적으로 34만장을 판매했다. 99년 혼성그룹 판매량 1위.

 

이후 이상민은 본인의 회사를 차리고 룰라와 디바를 주축으로 본인이 프로듀싱했던 가수들을 모아 브로스라는 패밀리 그룹을 결성하여 10월부터 활동했으며 10만장 가량의 판매량을 올려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다. 반면 채리나는 이해에 정규 음반만 3장을 발매하는 강행군을 하는 바람에 몸상태가 아주 안 좋아졌으며, 위암 투병까지 겹치면서 여러모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민은 룰라 재결합의 성공으로 인해 많은 부를 축적했고 샤크라 등의 인기 가수를 배출하며 유명 프로듀서로 성공 가도를 가게 된다. 이때부터 룰라 시절 매니저를 대표로 앉혀놓은 A&B 엔터테인먼트에서 가수를 관리했고 이상민은 총괄 프로듀서로 활동했다. 에스더, 디바, 샤크라 등이 이 회사 소속. 이 회사는 천일기획과 원섬미디어와 합병해 사명을 Jam 엔터테인먼트로 바꾸었으며 이 회사들과 연관된 여러 가수들이 복잡한 회사 사정으로 피해를 보기도 했다. 이상민은 2001년 쯤 상마인드를 차려 엑스라지, QOQ 등의 가수들을 데뷔시켰지만 얼마 안가 부도가 나버렸다.

채리나가 속해있던 디바 역시 멤버 교체 이후 이상민 프로듀스 하에 앨범을 발매해 히트를 치기도 했고, 프로듀서로 계약했던 월드뮤직에서 그가 제작했던 가수들이 손을 뗀 이후에도 계속해서 히트 앨범을 발표하다보니 더 이상민의 이름이 널리 떨쳐지던 시절.

 

룰라 7~9집

룰라는 2000년 7집 풍변기곡(風變旗曲)으로 복귀해 국악과 테크노를 퓨전한 '풍변기곡'을 타이틀로 한 7집 활동을 했으며 가요 차트에선 5위 권 안에 들면서 선전했고 후속곡인 'Summer of Love'도 10위 안에 들면서 준수한 인기를 얻었다. 참고로 타이틀 곡보다 후속곡이 더 유명하며 후에 펌프에 수록곡으로 실린 적이 있다.

 

2001년에는 기존 히트곡들을 리메이크하고 일부 신곡을 넣은 8집 'Best&Last'를 내놓았으며 한 멤버의 사회복무요원 입소로 인해 게릴라 콘서트를 제외한 방송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이건 흥궈전문인데이 앨범으로 다시 해체를 선언한 룰라는 각자 활동을 이어가다가 중간에 재결합을 선언했지만 몇차례 불발되기도 했다.

그 뒤 무려 8년이 지난 2009년 7월 이현도[], 현진영, 유건형, 길 등의 프로듀싱하에 9집 'A9ain'을 내놓았으며 활동 당시에 그룹의 히트곡이 재조명되었다.[]컴백을 알리기 위해 출연한 라디오 스타에서 레전드 회차를 만들어내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레전드 방영분을 만들어냈으며 다른 예능 프로그램들에도 꽤 출연했다.

9집 앨범은 타이틀 곡 <고잉 고잉>으로 활동했고, 후속곡 겸 서브 홍보곡 <같이 놀자>는 전성기 시절 룰라를 떠올리게끔 한다는 평가를 받아 음악적으로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다만 이런 저런 문제[] 때문에 기대한 것만큼의 활동을 하진 못해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여러 방송에 출연해 모습을 보였고 아직 녹슬지 않은 기량을 뽐냈다.

 

룰라 맴버 근황

대다수의 남자 멤버들이 범죄자로 전락했으며 다른 맴버도 비극적인 사고나 사건을 겪었다. 라디오 스타에서 김구라는 이를 두고 데스노트를 능가하는 룰라의 저주라고 수식하기도...


이상민은 그 전에도 사업 실패와 이혜영과의 이혼 및 그 과정에서 드러난 행각 등 온갖 구설수에 오르다가 끝내 불법도박 사이트 및 대출 사기 혐의로 입건되어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의 유죄를 선고 받으면서 출연 정지를 받아 방송에서 모습을 감추었다가[] 2012년 5월 엠넷의 음악의 신을 통해 방송에 복귀하고, 이후 2013년 1월 11일부터 2013년 5월 27일까지 JTBC 예능 프로였던 남자의 그 물건에서 고정, 더 지니어스 시즌 2 우승자가 되는 등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회복했다. 그 뒤 다수의 케이블 방송에서 고정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KBS와 MBC에서도 출연 정지가 풀리면서 제 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다른 멤버들에 비하면 어느 정도 수습도 가능했고 방송복귀 후 본인의 처신도 좋았기 때문에 여론의 반응도 좋아져 성공적으로 방송에 복귀한 케이스다.[] 빚은 아직 갚는 중이라고 하며 그가 잘나갈 때 그의 통장에 48억 원이 있었다는 것이 무색하지만, 본인은 현재 인생이 행복하다고 한다.


신정환은 2005년 도박 사건으로 인하여 잠시 방송활동이 일시 정지되었으나[] 당시 장애인을 돕는 동영상이 공개되어 이미지에 그다지 타격을 받지 않았다. 이에 힘입어 방송에는 불과 3개월만에 복귀하고 여러 프로그램에서 활약하며 다시금 버라이어티와 애드립의 황제로 떠올랐으나 2010년 재차 원정 도박과 방송 무단 불참에 이어서 무엇보다도 뎅기열 거짓말로 인해 방송 출연이 어려워졌다.[] 오랜 도피 생활로 인한 다리 수술 부위 악화로 재활치료를 받고 법원에서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성탄절 사면으로 가석방되었다. 그 뒤로도 사기 혐의 등 여러 구설수에 휘말리고 본인도 방송 복귀 의지를 갖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는 앞으로 방송에서 그를 보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띠동갑의 연하 신부와 결혼에 골인하면서 개인적으로는 괜찮게 생활하는 듯. 본인이 속해 있는 테니스 모임의 부원들한테 자주 얻어먹는다고 한다. 싱가포르에서 빙수 가게를 운영하는 관계로 한국에 머무는 시간이 3개월 정도 밖에 안된다는 내용의 기사가 나온 걸로 봐서는 방송활동 재개확률이 크지 않아 보인다. 같은 동료였던 탁재훈은 사실상 연예계에 복귀한 반면 신정환의 경우는 그런 모습을 보기가 힘들듯 했지만, 최근 한국으로 돌아와서 코엔스타즈와 계약을 체결하고 복귀 준비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2018년 8월, JTBC의 아는 형님에 섭외, 촬영을 결정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촬영은 순조로웠지만 반응이 꽤나 안좋아 그 이후로 방송출연이 없다. 2020년 9월 21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유튜브 채널을 통해서 복귀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채널명은 신정환장. 기사 그 후 타 채널에도 출연하는 등 유튜브 한정으로 꽤 활동하고 있는 중이다.


고영욱은 이상민과 신정환의 죄질을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중죄인 미성년자 성폭행 및 성추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복귀했거나 굳이 복귀하지 않고도 다른 돈벌이를 모색할 여지가 있는 다른 멤버들과는 다르게 평생 방송 활동은커녕 일반적인 사회 생활을 하기조차도 불가능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사실상 룰라에서도 쫓겨났으며 연예계에서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혔다. 근데 인스타로 복귀하려고 했었다.


여성 멤버 채리나는 별다른 논란 없이 방송에 게스트로 나오는 등 건실하게 활동했지만 안타깝게도 2012년 10월 17일 강남의 한 술집에서 일행 4명과 함께 얘기하고 있었을 때 같은 술집에 있던 괴한이 갑자기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다칠 뻔했다. 본인은 다행이 큰 부상은 없었지만 이 사건으로 지인인 강희지[]가 사망하고, 야구 선수 박용근은 중태에 빠졌다.[] 이에 대해서 룰라 남성 멤버들 때문에 "양아치들이랑 어울리니까 그렇게 된 거다."라든가 "이건 룰라의 저주다." 같은 조롱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녀는 룰라 남성 멤버들처럼 나쁜 짓을 한 게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 입장이었고 이로 인해 한동안 밖에 나가는 걸 꺼릴 정도로의 트라우마가 생겼었기 때문에 이런 비난을 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행동이다. 그 뒤에도 방송 활동을 종종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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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남은 여성 멤버인 김지현은 라디오 스타에 출연 이후에 근황을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라디오 스타 이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때는 양악 수술을 하여 당시에는 큰 파란을 일으킨 것, 2014년에는 언니들이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활동했다. 2015년 6월에 언니들 활동당시의 소속사와 법적인 분쟁이 발생했다. 전 소속사는 그녀를 배임 및 사기혐의로 고소했으나 어떻게 합의는 된 모양이다. 또한 그녀는 와인바, 소주방을 운영하다가 실패한 경력이 있다. 몇가지 사건은 있었지만 사실상 채리나와 같이 사고를 치지 않은 멤버다. 2016년 10월에 2세 연하의 사업가와 결혼했으며, 다음 달에 결혼한 채리나 - 박용근 부부와 동반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잠시 룰라의 임시 멤버에 속했던 하늘은 2013년 9월 중순 이유없이 갑자기 의식을 잃은 뒤 같은 해 10월 8일 뇌사 상태로 26살의 젊은 나이에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났다.


룰라 5집 연인에서 활동한 객원 멤버인 마이키 로메오는 독일로 귀국한 뒤 DJ를 하면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공연하고 사진도 올리면서 근황을 전하고 있다. 채리나의 말에 의하면 마이키 로메오가 소속사 사장님과 동갑내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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