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들 정보모음

핑클 이효리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2. 10. 18. 08:48
728x90
반응형

대한민국의 가수 겸 방송인. 4인조 걸그룹 핑클의 멤버이자 리더.

만 19세였던 1998년에 1세대 걸그룹 핑클로 데뷔해서, 만 24세였던 2003년부터 솔로 가수로 활동하며,
1999년, 2003년, 2010년, 2013년 가요대상을 수상한 경력을 갖고 있으며, 가요대상과 연예대상을 모두 수상한 최초의 인물이다.

2000년대에 왕성한 활동을 하며, 가수 겸 예능인, CF모델 겸 패션모델, 방송인으로 활동하며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대한민국 아이돌 출신의 솔로 가수 활동에 대한 업계의 편견을 깨뜨리고, 여성의 섹시 이미지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적 편견'을 깨부수는데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대한민국에 '다양한 문화를 선도'하여 유행시키는 트렌드 세터였다.

1998년에 자본주의의 꽃으로 연예계에 등장해, 2010년부터 사회적 발언을 하는 '사회운동가'로 활동했으며, 채식주의자이자 동물 애호가로도 유명한 연예인이다.

대중들의 편견에 정면으로 맞서며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을 설득해 나갔고, 큰 호응을 얻었던 방송인 중 한 명이다.

 

이효리 인기

2000년대 대한민국 가요계를 대표하는 솔로 가수 중 하나이자 가요계의 섹시 디바로, 그 계보는 김완선-엄정화-이효리로 이어져 내려온다. 그 뒤를 이을 주자로는 현아, 선미, 청하, 화사, 제시, 가인, 서인영 등이 손꼽히고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독보적인 아이콘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대상만 열 번을 수상한[] 탑 솔로가수이자, 대한민국에 '다양한 문화를 선도[]'하여 유행시키는 대표적 트렌드 세터인 동시에 호스트로 활동한 대부분의 방송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흥행시킨 예능인. 이효리라는 이름 자체가 브랜드가 될 정도로 슈퍼스타로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광고산업 최초의 헌정광고(삼성그룹 '고맙다 효리야' 편)의 주인공, 신문 1면을 무려 891번 기록하여 글로벌 기네스북에 등재되는 등 대한민국 연예계 역사에 있어 아래와 같이 '최초', '유일' 등의 수식어가 붙는 다양한 기록들을 창출한 슈퍼스타이자 리빙 레전드이다.

이효리는 아이돌 태동기였던 1990년대 후반 '1세대 아이돌 출신'으로 가요계에서 활약했으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돌 전성기가 도래하던 2000년대 중반 수많은 솔로 가수들이 아이돌에 밀려 사라져가는 것을 보면서도 '솔로 가수'로서 끝끝내 가요계 정상의 자리를 지켜내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지상파 방송 3사의 가요 시상식이 중단된 시대(2000년대 중반~2010년 초반)에 활동을 하면서도 가수로서 가요대상 9개와 연예대상 1개를 수상하고, 광고방송업계(CF광고)에서 여가수 최초로 '최우수 모델상'을 수상했으며, 패션모델로서 '아시아 최초 모델' 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하고, 대학가요제 최장기 여성 MC를(9년 연속)를 맡는 등 방송업계 내에서 다방면에 걸쳐 높은 위상을 가졌던 2000년대를 대표하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2000년대에 활동한 수많은 아이돌 출신 여자 가수들의 롤모델로 손꼽히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효리 데뷔

1979년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現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오송리에서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 아버지는 8평[] 정도의 이발소를 하고 있었는데,[] 이 이발소에 딸린 방에서 여섯 명의 가족이 가난하게 살았다.[] 아버지가 굉장히 엄한 분이어서, 어릴 때 반찬 투정을 하거나 반찬을 골라 먹으면 밥상을 엎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까만 피부색과 짧은 머리카락[] 때문에 '못난이' 라는 별명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하고, 중학교를 이전퇴학[]한 경험이 있다고 하며, 일찍부터 학업과 생계활동(아르바이트)을 병행하며 성장했다고 한다.[]

서문여자고등학교(이하 서문여고) 재학 시절부터 연예계 매니저들에게 자주 명함을 받다보니 자연스레 연예인을 꿈꾸게 되었다고 한다. [] 핑클로 본격 데뷔하기 전에는 EBS 청소년 드라마 <감성세대>(1996)에 단역으로 등장한 바 있다. [] (# 감성세대 1화, 4화에 등장한다. # 이상순의 세계음악기행 라디오에서 '이효리'가 직접 언급 1:21)

서문여고 재학 시절에는 지역에서 잘나가는 걸로 매우 유명했다고 한다. [](이효리에 대한 소문은 대표적으로 휘문고 김동완, 세화고 성시경, 현대고 노홍철, 광남고 옥주현, 은광여고 한혜진, 중경고 양파와 문희준, 유진 등의 동료 연예인들이 방송에서 증언한 적이 있다. 노홍철이 가지고 있었던 고등학생 때 이효리 사진이 방송에 공개된 적이 있다.# 1:53)

김동완, 이지혜와 혼성그룹을 준비하기도 했었다. (이효리가 HOT 매니저에 의해 SM 오디션을 보고 연습생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팀이 해체. 이후 김동완은 '신화'에 이지혜는 '샵'에 들어가 활동하게 되었고, 이효리는 생계활동(아르바이트)도 못하고 타이트한 연습생 생활만 강요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빠른 퇴사를 하게 되었다.(1세대 걸그룹 SES의 초대 멤버 후보였다는

여기저기 옮겨다니다 최종적으로 대성기획(이하 DSP)에 정착했다고 하는데, 이에 관해 방송에서 공개된 캐스팅 비화가 3가지 있다.[] 이효리가 힐링캠프(2012년 4월 16일자, 39회 방송)에 출연해서 밝힌 일화에 따르면, 대뜸 '나 이호연이요'[]라고 전화가 와서 사장을 만났다고 하는데, 만나서는 노래나 춤 하나도 안 시켜보고 훑어보고 바로 뽑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이효리는 다른 매니지먼트 업체와 계약한 상황이었고 원래는 샵과 업타운이 소속되었던 월드뮤직에서 업타운 정연준의 기획 하에 '업타운걸스'라는 3인조 팀을 준비하고 있었다. (구성원은 업타운의 여성 멤버였던 윤미래, 1999년 '히트(Heat)'로 데뷔하게 되는 배우 '임유진' 그리고 '이효리' 3인이었다.[])

당시 DSP는 이효리를 데려오기 위해 월드뮤직과 컨택을 했는데, 조사해보니 이 월드뮤직이라는 회사가 이효리에게 말도 안 되는 계약 조건으로 계약한 상태여서 이 점을 낚아채고, 즉시 월드뮤직에 위약금을 물어낸 뒤 이효리를 데려왔다고 한다.#[] (업타운걸스는 일부 녹음까지 마친 상황이었지만 이효리가 DSP로 이적하면서 무산되었고 이효리는 핑클로, 윤미래는 타샤니로 나오게 된다. 그리고 핑클의 원래 데뷔조 멤버였던 애니[]는 그룹 색깔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데뷔 직전 핑클에서 탈퇴하고, 이효리가 원래 소속되어 있던 '월드뮤직'에 들어가[] 윤미래와 함께 타샤니로 데뷔하였다.[])

훗날 다른 핑클 멤버들의 증언에 의하면, 데뷔하기 전 처음 이효리를 만났을 때 그녀는 펑퍼짐한 힙합 패션으로 옷을 입고 나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미모와 몸매가 돋보여서 깜짝 놀랐을 정도라고 한다. '애니'가 빠지고 세 명이 된 이후 대략 20여명의 멤버 후보들이 거쳐가는 동안 공백기와 함께 세 멤버 모두 몹시 불안했었는데, 멤버가 부족한 상태에서 각자 파트를 녹음해놓고 대기 중이던 어느날 이효리가 마지막 멤버로 합류하게 되었다. 성유리의 경우, 이효리를 처음 보고 '됐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동시에 이효리도 성유리를 보고 안심했다고 한다. (성유리의 말에 따르면, 세 명이서 찍은 프로필사진을 본 이효리가 핑클에 합류하길 주저했었다고 한다.#) 이진의 경우, 이효리를 처음 봤을 때 옷차림과 얼굴을 보고 자신보다 어린 줄 알고 곧바로 말을 놨었다고 한다. 이효리도 그런 이진을 보고 '언니'로 착각해서 그러려니 넘어갔는데, 이 헤프닝 덕분에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말을 놓고 편하게 대화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옥주현의 경우, 사실 HOT 팬일 때부터 이효리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일부 HOT팬들 중에 토니안의 팬이었던 이효리의 사진을 연예인 사진처럼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옥주현도 그 중 한 명이었다. 평소 좋아했던 '언니'가 핑클에 들어와서 너무 기뻤다고 한다. 보여지는 이미지로는 대단히 청순한 언니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만나고나니 너무 '솔직하고 털털한 성격'이어서 놀랐었다고 한다.

1998년 국민대학교 공연예술학부 연극영화학과에 입학하여 2006년에 졸업했으며[88], 2009년 경희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 대중예술전공에 진학했다.

1998년 5월 12일[], 1세대 걸그룹 핑클로 데뷔[] 하였다. 데뷔 당시,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청순한 외모와 글래머러스한 몸매[]로 주목 받았다. 핑클의 외모 담당은 성유리였지만, 털털한 성격과 눈웃음 때문에 20~30대 남성 팬들이나 군인 팬들이 많았다. 이효리의 끼는 핑클 3집 'NOW' 때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기존의 요정 같은 이미지를 고수할 때엔 보이지 않았던 무대 장악력이 성숙한 컨셉을 통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또 2002년 핑클 정규앨범 4집 활동을 마치고 나서 KBS의 예능 프로그램 <해피투게더>와 MBC <타임머신>의 MC로 데뷔했는데[], 시청률에서 꽤 성공을 거두어 '효리 임팩트' 또는 '효리 효과'라는 단어가 방송가에서 쓰이기도 했다. 가수로서의 이효리와 예능인으로서의 이효리의 역량은 이 시절 즈음부터 쌓아 왔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2003년 8월 13일, 그녀는 대망의 첫 솔로 앨범인 <Stylish...E>를 내놓으며 솔로 가수로 데뷔하게 된다.

 

이효리 핑클 활동

걸그룹 최초로 가요대상을 2회 수상하면서도, 같은 시기에 많은 예능 활동을 하고 있었던 보기드문 아이돌 그룹이었다.(핑클의 특이점으로 '가수 활동' 보다 '예능 활동'이 더 많다보니, 가수인데도 90년대 활약했던 코미디언 출신들과 다 아는 사이이다. 유재석, 신동엽, 강호동, 김국진, 이경규, 박수홍, 이휘재, 지석진, 최양락, 박미선, 박명수 등등 여러 코미디언들과 함께 방송 활동을 했었다.) 남녀노소 세대를 초월하여 그 시절의 대중들에게 '핑클'이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던 아이돌 그룹이다. (대중가요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 조차 다른 그룹은 몰라도 '핑클'의 이름은 알았을 정도로 '대중적'인 그룹이었다. 핑클빵, 핑클우표, 핑클 공중전화카드, 핑클 스티커사진, 핑클 악세사리, 핑클 게임 등등 사회 다방면으로 '핑클'만큼 영향력을 끼친 그룹이 없을 정도였다.)

핑클은 흔히 말하는 1세대 걸그룹으로, 방송 3사 공연 때 외에는 신비주의가 기본이었던 아이돌[]의 관행을 깨고, 전무후무할 정도의 예능감을 가지고 압도적으로 많은 야외 버라이어티 활동(예능&오락 쇼)에 게스트로 참여했었지만, 유튜브도 없었던 시절이었고, 방송사 홈페이지의 VOD 관리도 체계적이지 않았던 시절이라 제대로 남아있는 영상자료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세월과 함께 본의 아니게 신비주의 그룹이 되어버린 핑클, 이제는 아이돌 세계에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는 핑클이야기를 글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핑클을 이야기함에 있어 SES이야기가 빠질래야 빠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대중들이 기억하는 핑클은 SES 때문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잠시 설명하자면, 대기업 SM 소속이고, 1997년에 먼저 두각을 나타냈었으며, 실력(바다)과 비주얼(유진, 슈)이 모두 갖춰진 완성형 걸그룹이었기에 SES의 인지도는 시작부터 대단했었다. 오죽하면, 국내에서는 더이상의 팬층 유입이 어려울 정도로 한계에 도달했다는 판단하에 해외로 눈을 돌려 일본시장 개척을 위해 SES의 활동 장소를 옮기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SM은 SES 이후로, 보아가 일본시장 개척에 성공했고, 장나라가 중국시장 개척에 성공했다.[]) 이 시점에서 SES가 국내에 없더라도 HOT, 젝스키스, NRG, 태사자, 베이비복스, 디바, 신화 등등의 1세대 아이돌 그룹들 외에도 아이돌이 아닌 솔로, 듀오, 트리오 가수들의 활동(이선희, 이승철, 이승환, 김건모, 엄정화, 임창정, 유승준, 김현정, 조성모, 양파, DJ DOC, 터보, 쿨, 클론, 영턱스클럽, 컨츄리꼬꼬, 비비 등등)도 치열하게 경쟁했었기 때문에 후발주자인 미완성형 핑클의 초반 인지도는 매우 형편없었다.(단지 그 대단한 'HOT'에 '젝스키스'라는 대항마를 마련했던 대성기획(이하 DSP)이 이번에도 그 대단한 'SES'에 대항하기 위해 걸그룹을 준비한다는 소문만 무성했을 뿐이었다. 그 당시 핑클과 SES의 위상을 비교해보면, 기독교에 나오는 다윗(양치기)과 골리앗(대장군) 수준이었다.)

핑클은 특이하게도 가요 무대에 데뷔하기 전부터 아이돌 그룹이라는 이름만 알리고, 곧바로 야외 버라이어티 행사를 뛰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유로 정확한 데뷔 날짜를 아무도 모른다. 1998년 3월 잡지 '뮤직웨이브' 신인 코너에 핑클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했으며, KMTV에서는 4월에 데뷔한 그룹으로 2번 소개된 적이 있으나('비공식 무대' 공연을 했다는 소문이 있다.), 1998년 당시의 일부 팬들에 의해 5월 12일로 굳어졌다고 한다. # 지식백과 CD앨범 리뷰 참조.) 국내활동에 전념하는 대신 '가요 활동'이 끝난 직후 곧바로 '예능 활동'으로 전환하는 방식으로 쉬는 텀 없이 활동을 계속 이어가는 이색적인 걸그룹이었다. 최소 2년간 핑클의 이러한 꾸준한 활동 덕에 SES의 인지도를 추격하여 마침내 따라잡게 되었는데, 이는 후대 아이돌 걸그룹 원더걸스와 소녀시대의 상황과 매우 유사해서 소녀시대의 전성기 시절에는 '핑클과 소녀시대의 평행이론' 같은 글이 이슈가 되기도 했었다. 다만, SES는 원더걸스처럼 흔들리지 않고 처음부터 해체하는 그날까지 꾸준함을 보여주어 2020년 현재에도 1세대 걸그룹의 양대 산맥으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

(순발력은 떨어지지만 80kg 성인남성도 거뜬히 들어 옮기는 괴력의 소유자, 격파 능력 최상급. 천하장사 목소리도 큰 옥주현, 완력은 다소 부족하지만, 순발력과 운동센스가 매우 좋아 출발드림팀 여성부의 에이스였던 20대의 이효리.(패떴의 30대 '꽈당 이효리'는 잊어주세요.) 이 두 멤버라면 지금의 아육대(아이돌스타 육상 선수권대회) 같은 예능에서 참 재미있게 놀았을 듯 싶다.)

핑클의 결성 과정도 알고보면 드라마틱한데, 1987년 최초의 한국형 아이돌 그룹 소방차(아이돌)를 결성해 아이돌 그룹의 가능성을 확신하게 된 이호연씨는 대성기획(이하 DSP)을 설립한다. 이후 새로운 아이돌 그룹을 준비하려던 이호연 사장은 이수만 사장이 설립한 SM이 보이그룹 HOT로 성공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고[], 서둘러 그 대항마로 보이그룹 젝스키스를 결성해 큰 성공을 경험한다. (이 일로 연예계에서 중소기업 대성기획의 위상은 단번에 대기업 SM의 라이벌 회사라는 위치까지 격상되었다.) 그 후 이호연 사장은 미국에서 3인조 걸그룹으로 큰 명성을 날린 TLC를 벤치마킹하여 3인조 걸그룹(김준희, 애니, 옥주현) 핑클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SM측에서 더 빠르게 걸그룹 SES(똑같이 TLC를 벤치마킹해서 바다, 유진, 슈로 구성된 걸그룹)을 결성하여 대박이 났었다. 이에 이호연 사장은 생각을 바꿔서 SES의 대항마가 될 걸그룹을 결성하기로 마음 먹고는, 준비하고 있었던 3인조 걸그룹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기존 멤버 '김준희'가 빠지고[98] 대신 '애니', 옥주현, 이진, 성유리로 새로운 4인조 걸그룹 핑클을 결성했는데, 이호연 사장이 보기에 SES와 비교를 해보니 도저히 SES를 감당할 것 같지 않자, 다시 한번 그룹의 컨셉을 바꾸기로 한다. 이렇게해서 '애니'가 멤버에서 제외되었고, (이후 '애니'의 행보에 대해서는 # 데뷔 참조) 비어있는 한 자리를 채워줄 피스메이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대략 20명 정도의 후보들이 거쳐갔다고 한다.) 그 자리에 들어온 마지막 멤버가 이효리였던 것이다.(이효리를 본 핑클 멤버들의 첫인상에 대해서는 # 데뷔 참조) 이렇게 급조된 핑클은 기존 아이돌 그룹처럼 신비주의 걸그룹 컨셉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새롭게 결성된 핑클의 리더(이효리)가 그런 컨셉이 천성적으로 맞지 않았던 탓에 핑클은 예능돌의 시조가 되었다.

1998년 5월, 1집 앨범 데뷔곡 블루레인(Blue Rain)을 선보였지만, SES의 대항마라는 소문으로 꽤 높은 기대를 받고 있던 핑클이었기에 업계의 평가는 좋지 않았다. 2015년 옥주현의 회고에 따르면(), 멤버들조차 '당연한 결과'라고 담담하게 받아들였을 정도라고 한다. 시간을 들여 노래 실력을 향상시키기보다 그 시간에 야외 행사 스케줄을 소화해야하는 형편이었다. (핑클은 1세대 예능돌이자 동시에 1세대 생계형 아이돌이었다.)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대외 활동에만 쏟고 있었기에 언제 어떻게 무너질지 기약할 수 없던 암담한 상황이었다. 이 때 이호연 사장의 발빠른 행동력으로 내 남자친구에게(핑클)를 준비했다. 어둡고 애절한 컨셉의 블루레인과는 다르게, 밝고 명랑하며 귀여운 소녀 컨셉이었는데, 이 노래가 대호평을 받으면서 타이틀곡 블루레인도 재조명되어 1위 후보곡에 오를 정도였다. (핑클의 데뷔곡 블루레인이 망했다고 잘못알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지역 방송 1위, 지상파 방송 2위를 달성했었다. 그 해 시상식에서는 '정작' 1위곡이었던 '내 남자친구에게', '루비(슬픈 눈물)'보다 '블루레인'으로 많은 수상을 하였다.)

위의 상황이 핑클 데뷔 2주 ~ 4개월 정도 되었을 때였다.[] 여전히 SES를 따라가기에는 인지도면에서 너무 멀게만 느껴졌었고, 수많은 안티팬들의 방해에 시달렸지만,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을 보면 HOT 팬들과 젝스키스의 팬들이 서로 싸우는데, 핑클의 경우 이 두 팬클럽이 모두 핑클의 안티팬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SES의 팬들은 물론, 다른 아이돌 그룹의 팬들까지 대부분이 핑클의 안티팬이었다.- 슬램덩크 패러디 : 관객의 대다수는 우리를 싫어하는 안티들이다. 그렇다면 우린 악당인가? '악 당 등 장!!', 산왕공고(SES) 팬들 앞에 '무대 공연'을 위해 등장하는 북산(핑클)의 모습은 만화 속 현장 분위기와 흡사했다.) 그들이 무대에 닭다리를 던지든[], 멤버들 얼굴에 계란을 던지든, 핑클 차량에 토마토를 던지든, 멤버를 화장실에 끌고가 괴롭히든[], 저주의 편지를 보내거나 욕설과 악플을 던지고 소설을 써서 악성 루머를 만들어 소문을 내든 간에 핑클은 활동을 멈추지 않고 앞만보고 달렸다. 데뷔곡으로 2위, 후속곡으로 1위를 차지한 핑클의 삼속곡 루비(슬픈 눈물)는 '블루레인'의 발라드 분위기에 '내남자친구에게'의 소녀스러운 이미지가 합쳐진 곡으로, 주변의 우려와 달리 이 곡은 남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으며, 핑클은 이 때 처음으로 청순한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물론 예능 활동을 할 때는 철저하게 망가지기도 했었다.)

데뷔하고 1년이 지나 1999년 5월에 2집 앨범 타이틀곡 영원한 사랑이 공개되었을 때, SES와의 간격은 급속도로 좁혀지기 시작했다. 이 노래로 핑클은 요정 이미지를 얻게 되었고, 그 해 가요대상을 2회 수상하면서 1세대 최고의 걸그룹 SES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방송업계에서는 SM vs DSP의 소속사 간 라이벌 구도를 이용해 HOT VS 젝스키스 때처럼 SES VS 핑클 구도를 만들어 적극 이슈화시키기 시작했다. 방송 홍보물에는 요정 vs 요정으로 표현되었지만, 팬들 사이에서는 신비주의 SES와 예능에서 망가지는 핑클의 이미지가 같은 요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달랐었기에 여신 vs 요정 으로 구별하기도 했었다. 타이틀곡 '영원한 사랑' 이후로도 후속곡 '자존심'과 그 외 'Wating for you' 등 2집 수록곡들이 히트를 치며, 핑클의 인기가 가파르게 고공행진하기 시작했다.

1999년 10월, 2.5집 앨범으로 크게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나의 왕자님께', 'White', '가면의 시간'이 히트를 쳤었다. 밀려드는 CF, 방송활동이 늘어나자 2.5집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각종 행사에도 1순위로 불려나가고 해외에서까지 '핑클'에 대한 러브콜이 울리기 시작했다. (국내 활동만 했는데도, 중국측 업계의 초청으로 '대만 콘서트'를 했고, 북한 평양에 가서 무대 행사를 했었다.) 2000년 5월 젝스키스가 해체하자, 이 모든 게 이호연 사장과 핑클 때문이라는 젝스키스 팬들의 어긋난 분풀이가 핑클 멤버들을 괴롭혔지만, 핑클의 기세는 여기서 꺾이지 않았다.

2000년 8월,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에 핑클은 주변의 많은 우려를 뒤로한 체 또다시 이미지 변신을 단행하였다. (이 당시 가요계는 '별들의 전쟁' 이라는 명칭이 생길 정도로 당시 가요계에 Big3라 불리던 H.O.T., 서태지, 조성모가 컴백해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고, god의 '거짓말', 박지윤의 '성인식', 이정현의 '와', '너'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었던 상황에서, 핑클은 2년을 쉼없이 예능방송과 가요방송을 오고가며 이미지 소모가 심했었던 차였다.) 1집 앨범의 소녀 컨셉에서 2집 앨범의 요정 컨셉을 지나 3집 앨범에서는 커리어 우먼 컨셉을 보여주었다. 종전과는 다른 성숙한 모습과 파워풀하고 섹시한 춤과 노래를 공개하며, 단숨에 높은 인기를 얻게 되었다. 완벽해보였던 SES에게 단 하나 부족한 게 있었다면, 핑클처럼 단계적으로 성숙하는 모습이었다. SES는 처음부터 완벽했으니까(SM이 S.E.S를 만들 떄 처음 설정했던 컨셉이 '커리어 우먼' 이었다.) 변화의 위험을 시도할 필요가 없었지만, 반대로 핑클은 처음부터 완벽하지도 않았었고 SES를 따라잡아야한다는 그룹의 존재 이유이자, 숙원(타도 S.E.S)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선택을 했었다. 핑클의 3집 앨범 타이틀곡 'NOW'가 방송 3사에서 1위(이하 그랜드 슬램)를 하는 등 반응이 대단했다. 이 3집 앨범 활동 때에는 그동안 완벽해보였던 SES도 완벽하지 않게 보이기 시작했을 정도로 핑클의 위상이 높아졌던 시기였다. 걸그룹은 남성팬이 대다수였고, 더 어린 걸그룹이 나오면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된 팬들이 많아 소속사 입장에서는 불안요소였는데 3집 때에 비로소 여성팬층이 두터워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효리의 무대 퍼포먼스가 주목받게 되며, 핑클의 마스코트하면 성유리라고 생각했던 대중들에게 핑클의 마스코트는 성유리와 이효리 투탑이라는 인식을 각인시켰다. 연말에는 후속곡 'Feel Your Love'로 활동을 하는데, '교복컨셉', '힙합컨셉', '작업복컨셉' 등 무대마다 각양각색으로 변신하는 의상으로 주목받았는데 그 중 메인인 '스쿨룩'이 화제를 모았다. 이 당시 이효리가 랩을 시도해 '랩퍼횰'이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했었다.

그러나 핑클의 3집 활동은 갑작스럽게 흐지부지 끝나게 되는데, 옥주현이 예능 활동 중 다리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99초 스탠바이 큐 촬영 중 발생한 사고로, 총 42화 중 24화까지 출연하던 핑클은 이때 하차하게 되었다. 그 시절 예능은 위험천만한 게 참 많았었는데, 예능 촬영하다 사고로 죽거나 죽을 뻔한 연예인들이 꽤 많았다. - 핑클도 데뷔초에 빨간옷을 입고 '싸움소'에게 시비를 걸어야하는 '서바이벌 게임(?)'을 해야하기도 했다. # (자유선언 오늘은 토요일 9:06 '싸움소' vs 핑클)) 아쉬운대로 3.5집 앨범 준비에 착수하는데, 핑클의 1000일 파티(핑클과 인연이 깊었던 유재석이 진행을 맡았다.) 때에도 옥주현은 휠체어에 앉아서 노래를 불러야 했었다. 이때부터 SES와 핑클은 방송에서 '띄워주는' 라이벌이 아닌 멤버들과 팬들이 인정하는 대등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고,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각각의 팬덤들은 이런 저런 근거들을 수집해서 SES와 핑클 중 누가 최고냐는 말을 해대고 있지만, 방송업계는 두 그룹의 우열 가리기를 포기하고 양대 산맥이라는 말로 결말을 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2001년 핑클의 3.5집 리메이크 앨범도 대호평이었다. 그야말로 완숙해진 핑클이었다. 이효리의 보컬 역량도 인정받으며, '당신은 모르실거야'로 다시 한번 방송 3사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며, 그 해에 '대상 후보' 격인 '최고 인기상'을 수상했다. 후속곡 '늘 지금처럼'도 히트를 쳤다. 2002년에는 '공백기'라는 이름으로 쉬는 시간을 보내면서 '4집 앨범'을 준비함과 동시에 아이돌 업계 최초로 '개인 활동'도 하기 시작했다. 옥주현은 '별이 빛나는 밤에' 라디오 DJ를 맡아 '라디오 부문 우수상'을 받았고, 이진은 '논스톱3'라는 MBC 시트콤에 출연하여 '신인 연기상'을 수상했다. 성유리 또한, '나쁜 여자들'이라는 SBS드라마에 출연하고, MBC '섹션TV연예통신'에 MC를 맡기도 하였다. 이효리는 예능방송 '타임머신(MBC)'(박수홍과 함께 진행)과 ,'해피투게더(KBS)'(신동엽과 함께 진행)을 맡으며 'MC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3월에 등장한 핑클 4집은 '역대 핑클 앨범 중 최상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앨범'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가창력부터 호평받으며 성숙한 느낌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SBS에서 '쇼! 일요천하 - 핑클과 가자가자'(주영훈과 함께 진행)라는 예능 방송에 고정출연하였다.) 이효리가 작사를 맡은 타이틀곡 '영원'이 대히트를 했고, 'Never', 'Don't go away' 등이 좋은 반응을 보였다. 이 시기에 핑클은 뮤직뱅크 무대의 대부분을 엔딩무대로 장식할만큼 최고의 걸그룹 대우를 받고 있었다. 최초의 여론 조사 기관 '리스피아르'는 상/하반기 여성 가수 1위로 핑클을 선정했었다.

2003년부터 멤버들이 흩어져서 본격적으로 '개인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효리의 경우, 그 해에 이효리 신드롬을 일으키며 가요계에 두각을 나타내었었다. # (2003 스타스페셜 핑클 (42:57)) '성유리 : 누군 잘되고, 누군 안 되고, 그러면 진짜 마음이 아프고 그러잖아. 다 잘 됐으면 좋겠고...' 옥주현, 이진, 성유리 모두 저마다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을 했지만, 솔로 데뷔 때부터 대한민국 역대 '레전드' 가수 중에 한 사람으로 기록될 정도로 두각을 보였던 이효리가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세 멤버들이 받은 상처('대중'들과 '업계 관계자'들의 '핑클 멤버 비교', 특히 옥주현의 경우 어머니가 이효리와 '비교'를 자주 하셔서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가 깊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개인 활동을 시작한 해에 이효리, 옥주현, 이진 세 사람은 모두 각자의 부문에서 '신인상'을 수상했지만, 성유리만은 해당사항이 없었다. 성유리의 경우, '개인 활동' 때 무엇을 해야겠다는 '꿈'이 없었다고 한다. 다른 세 멤버들이 능동적으로 새로운 분야에 도전을 하고 있을 때, 성유리는 소속사에서 시키는대로 진로를 정해 연기자의 길에 들어섰었는데, 업계의 대우도 그렇고, 다른 멤버들이 '신인상'을 수상하는 것을 보며 '나만 뒤쳐진다.'는 생각에 마음 고생을 많이 했었다고 한다.(2019년 캠핑클럽) 그렇게 멤버들이 흩어지고, 2008년 무렵이 되었을 때, 모두들 각자의 분야에서 '대중'들과 '업계' 관계자들에게 인정받는 위치에 서 있게 되었다.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근소한 차이로 음악성을 보면 SES, 대중성을 보면 핑클을 우위에 두는 편이다. (SES의 음악성을 얘기하는 것은 SES팬클럽에서 주장하는 '앨범' 판매 순위 때문이다. 팬덤 규모가 더 컸었다.(대기업 SM소속사의 영향력도 있고, 한국과 일본 양쪽에 팬덤을 만들었다.) 핑클의 대중성은 제일 첫문단에 적힌 것처럼 대중가요에 관심없던 기성세대들도 '핑클'의 이름은 알고 있을 정도로 다방면에서 활약했기 때문이다.) 핑클은 아이돌 그룹 최초로 '해체하지 않고' 개인활동을 하면서 다시 그룹활동을 하는 '따로 또 함께' 라는 활동을 시도하며 2005년에 핑클 DVD를 발매하는 모습을 보여줬었으나, 이후로 사실상 해체로 인정되는 분위기가 되면서 보이그룹 신화가 '따로 또 함께'를 완성시켰다. 그렇게 1세대 걸그룹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지만, 2010년. 이효리와 옥주현이 '서울문화예술대상'에서 각각 '대중음악 가수부문 대상'과 '뮤지컬 배우부문 대상'을 수상하게 되면서 핑클의 이름이 다시한번 방송업계와 대중들에게 각인되었다. (당시에 이진과 성유리도 드라마 배우로써 연기력을 인정받고 있었기에, 핑클은 개인활동을 시도한 최초의 아이돌 그룹인 동시에 모든 멤버들이 그룹활동과 개인활동에 성공한 최초의 아이돌 그룹이라는 상징성을 얻었다.)

결과적으로 2010년 핑클의 위엄이란 '모든 세대의 아이돌 그룹이 한번은 꿈꿔봤을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때부터 핑클의 안티팬들은 본격적으로 핑클 멤버 간의 '불화설'을 조장하며 핑클의 위상을 흔들기 위해 활발하게 활동했었는데, 당시에도 이진과 성유리는 '아이돌 출신'이라는 딱지를 떼기 위해 핑클과 멀어져있었고(당시 업계 분위기가 '아이돌 출신'을 철저하게 배척하고 무시하고 있었다.) 옥주현 역시 업계에서 '아이돌 출신'이라는 딱지를 떼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뮤지컬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멤버들 중 유일하게 이효리만이 2003년부터 2010년까지 꾸준하게 방송활동을 통해 대중들이 핑클을 잊지 않도록 추억을 상기시켜주는 활약을 했었으나('전직 요정'), 2010년 여름 '4집 바누스 표절곡 사기 사건'이 터지면서 이효리는 칩거에 들어가 연예계를 2년 가까이 떠나있게 된다. (약 4개월가량 칩거하던 이효리는 지인 김제동의 권유로 정신과 상담을 받은 이후 국내외 봉사활동을 시작하고, 사회적 발언과 유기견 보호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 사회운동가 참조) 그리고 2013년 복귀와 동시에 5집 앨범으로 2주간 활동을 하며 가요 차트 1위를 찍더니, 더이상 연예계에 미련이 없다는 듯 서울을 떠나 제주도로 내려가 서서히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게 된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전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 던지고 제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라는 유행어처럼 박수 칠 때 떠나려는 큰그림을 그렸다.[] - 5집 '미스코리아' 가사를 참조)

(1998년 대학생 신분으로 가요계에 데뷔하여 횟수로 15년차였었다. 이효리는 아이돌 태동기에 1세대 아이돌 출신으로 가요계에서 활약했으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돌 전성 시대가 도래하던 2000년대 중반에 수많은 솔로 가수들이 아이돌에 밀려 사라져가는 것을 보면서도 솔로 가수로서 끝끝내 가요계 정상의 자리를 지켜내는 저력을 보여주었었다. 가요계가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지상파 방송 3사의 시상식이 중단되었음에도 가요대상을 9개, 연예대상을 1개 수상하고, 광고방송업계에서 여배우들을 제치고, 여가수 최초로 '최우수 모델상'을 수상하며, 대학가요제 MC를 9년 연속으로 맡는 등 가수로도 예능인으로도 CF스타로도 패션모델로도 방송인으로도 업계 최정상의 자리를 차지했던 팔방미인이자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2014년 무한도전 토토가를 위해 '핑클'을 섭외하려고 유재석과 정형돈이 제주도에 내려가서 본 것은 # '콩농사'를 짓고 있는 이효리였다. (당시에 이효리는 자수, 도자기 굽기,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요가를 배우는 등 자기개발에 전념하며, 천천히 연예인이 아닌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 (SBS 연예뉴스, 이효리 작업실 블로그 통해 공개 '자수 작품, 인형' 이효리 손 거쳐)) 이 방송은 높은 시청률과 화제를 일으켰으나, 결과적으로 토토가에 핑클은 출연하지 못했다. 이효리의 '2008년 내 콘서트 이후로 멤버들을 만난 적이 없었다.'는 고백에 '핑클 불화설'의 오해가 기정사실화되는 듯 했다. (사실, 이효리는 지나간 과거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특성이 있다. 2010년 9월에 옥주현의 '가요광장' 라디오 방송에서도 함께 모였었고, 10월에 이호연 사장님의 병문안을 가서 다함께 1집 루비(슬픈 눈물)를 부르기도 했었다.)

2015년 힐링캠프 '신년의 밤' 특집 방송에서 MC를 맡고 있던 성유리가 이진, 이효리, 옥주현과 전화 통화를 하고, 성유리와 옥주현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김제동에 의해 이효리와 2차 전화통화를 하게 되면서 지긋지긋한 '핑클 불화설'이 종지부를 찍게 된다. # (오열했다고?)

2018년 대성기획(DSP)을 세우고, 젝스키스, 핑클, 클릭비, SS501, 카라 등을 만들었던 창립자 이호연 사장이 8년의 투병 생활을 끝으로 사망하게 된다. 이때부터 이효리는 핑클 멤버들을 만나는 꿈을 자꾸 꾸게 되었고(회한), 효리네민박(2017~2018) 제작팀들과 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캠핑클럽이 기획되기에 이른다. # 캠핑클럽 (효리&이진 : 주현이는 의지하고 싶고, 유리는 지켜주고 싶고...) (효리 : 나는? 너에게 있어서 나는 뭐야?) (이진 : 솔직히 말해서 언니... 몰랐어. 나랑 이렇게 비슷한 성격일 거라고는... 그 때는 몰랐다?) (효리 : 너네가 날 되게 싫어한다고 생각했어.)

마침내 2019년. 캠핑클럽은 높은 화제성과 시청률을 확보하며 방영되었고, 이 방송을 계기로 핑클 멤버들은 멀어진 기간동안 쌓여왔던 앙금을 털어내고 14년만에 완전체 핑클이 되었다. 마지막 회에는 사연을 통해 선별한 100명의 핑키(핑클)(핑클팬) 들을 위한 작은 공연을 연출하였다. # 2019년의 블루레인(이 당시 핑클처럼 멤버들이 각자 흩어져 활동하던 소녀시대 멤버들도 이 방송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이 방송을 계기로 흩어졌던 핑클의 팬들이 일부 집결하였고, 핑클 팬들은 이때부터 1년에 한번씩 지하철 역에 핑클 데뷔 기념 '전광판'을 설치하고 있다.

 

2020년 이효리와 옥주현이 SNS를 통해 서로 응원을 주고 받았다. 이효리는 옥주현의 뮤지컬 '마리 퀴리'의 커튼콜 장면의 영상과 함께 응원글을 올렸는데, 이에 옥주현이 화답하고, 이진과 성유리도 참여하였다. 이후 이효리가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 혼성그룹 싹쓰리 편에서 린다G로 다시 한번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자, 옥주현이 먼저 이효리에게 응원글을 올렸고, 이효리가 화답하며, 성유리와 이진이 참여하였다.

 

이효리 솔로 활동

신문 1면만 무려 891번 기록되어 기네스북에 실려있을 정도로 일상이 카메라에 노출된 삶을 살아왔었다. (신문 2면, 3면, 잡지, 인터넷 신문 등등의 모든 매체가 제외된 그 당시의 종이 신문 1면만을 기준으로 공개된 숫자이다.) []

유명 사진 전문가의 말을 비슷한 뉘앙스로 풀어서 말해보자면, '전 세계를 뒤져봐도 이효리만큼 카메라에 많이 찍힌 사람은 찾기 어렵다' (서울체크인에서) 라고 말할 정도로 공개&비공개 활동이 많았으나, 나무위키에 기록될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고, 유튜브도 없던 시절 때 활동이 많아서 지금에와서 자료를 찾기도 어렵다.

알면 알수록 연예계 행보가 남다른 슈퍼스타이다. '핑클'의 정체성을 대변하듯 방송업계에서 탑스타로 인정받은 후에도 방송의 재미를 위해 기꺼이 망가지는 이미지를 마다하지 않는 천상 연예인이며,[] 가수와 예능인 사이에서 양손의 꽃을 모두 잡았던 핑클 활동을 더욱 확장시켜, 방송업계 전반에 걸쳐, '가수'이면서 '예능인'이었고, 'CF스타'겸 '패션모델'로 활동하면서 9년 연속 '대학 가요제' MC(행사 진행자)를 맡기도 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을 했고, 그 모든 분야에서 입지전적인 성과를 나타낸 '시대의 아이콘' 이었다.

현역시절에는 가요계에서 발매 앨범마다 타이틀 곡이 1위를 차지하는 여가수였다. 특이하게도 '유명 작곡가'가 아닌 '무명의 신인 작곡가'들과 협업하는 걸 선호했고, 특정 장르에 치중하지 않고 앨범마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도전하며 100% 확률로 차트 1위를 차지했었기에 무명의 신인 작곡가들에게는 '가뭄 속의 단비'이자,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신예 작곡가 뿐만 아니라 신예 랩퍼 '라이머', '낯선', 신예 뮤지션 '박지용, 김태춘' 처럼 실력에 비해 인지도가 낮았던 사람들과의 협업을 주도하여 이효리 효과로 유명해진 사람들이 많다.) 이런 점은 (음악) 업계에서 이효리를 상당히 높게 평가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과정이 좋았는데, 결과까지 좋았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다만, 이런 점의 약점(?)을 노린 '바누스'가 자신을 신인 작곡가라며 접근해서, 저작권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노래들을 자신이 작곡했다며 이효리에게 접근해 사기를 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가수로써 이효리의 이력을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각각의 시기마다 가요대상을 수상한 가수이다. []

예능계에서는 핑클 때부터 코미디언들이 위기의식을 느껴야 했을 정도로 예능감이 좋았던 가수였었다. 방송 업계에서는 MC로 활동하든 게스트로 출연하든 '효리 효과'라는 말이 공식적으로 사용될 정도로 시청률을 끌어올려주는 능력은 인정받고 있었다. (패떴에서는 '효리 효과'를 노골적으로 예능용 기믹으로 차용하기도 했었다. 2013년 라디오스타 330회, 김국진님이 직접 '효리 효과'를 설명하기도 했었다.) 현역 가수로 활동 중에 연예대상을 수상한 특이한 이력이 있다. 세월이 흘러 2020년 기준으로, 가수 출신의 예능인이 많이 존재하고, 그 중에는 연예대상을 수상한 사람도 있지만, 현역 가수 중에 연예대상을 수상한 사람은 이효리 뿐이다. (이와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는 # 여담 참조.)

CF광고계에서는 탑 여배우들을 제치고, 여가수가 CF퀸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당대 최고의 CF퀸 김태희, 이나영, 이영애, 전지현과 함께 후보에 올라와있는 이효리 #2007년 최우수 모델 시상식) 여성부문 최우수 모델상을 수상하였다. 특이하게도 이날 행사에 축하공연을 한 가수가 이효리 본인이었다. # 2007년 '대한민국 방송광고 페스티벌' 축하무대 '애니모션' (초대 가수 : 이효리) - 1:21부터 본인이 축하공연하고, 본인이 후보가 되어,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수상을 받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내가 받을 상을 내가 미리 축하하는 가수?) 이전까지 이런 행사는 연기대상 시상식처럼 배우들의 '전유물'이었는데, 가수가 수상을 받게 되면서 일어난 특이한 헤프닝이었다.)

패션계에서는 인정받는 패셔니스타로 평소 저가의 빈티지 패션 스타일을 선호해서 그 방면으로도 유명했지만, 고가의 의상도 입었다하면 완판시키는 완판녀로도 활약했었다. (#2008년 MKMF 등장씬) (2000년대에는 '효리처럼 예뻐지자'는 뷰티 카페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이효리의 평소 트레이닝 옷차림'을 제외한 '대외적인 활동'에서 소화해내는 패션 스타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분석해서 정보를 공유하고는 했었다.) 2010년대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글로벌 기업 '아디다스 오리지널스'와 '스와로브스키'로부터 아시아 최초 공식 모델로 선정되었다.

MBC '대학가요제'를 9년동안 진행하며, 대학가요제 역대 최장기간 사회를 맡은 여성 MC라는 이력도 남기는 등 다방면에 걸친 활동을 하면서, 입지전적인 성과를 보인 '시대의 아이콘' 중 한 명으로, 후대 '아이돌 출신 가수'들과 '솔로 활동을 하는 여자 가수'들의 롤모델이 되고 있다. 결혼 이전에는 '연예계에서 성공한 위상(돈과 명성)'에 대해 존경받았었다면, 결혼 이후에는 '소탈한 삶을 추구하는 마인드'와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설계해서 실천해나가는 모습' 등 보다 다양한 이유로 존경받는 연예인이 되었다.

2013년 9월 1일, 결혼과 함께 '서울'을 떠나 '제주도'에 내려간 후, 서서히 활동이 줄어들면서 연예계를 떠난 듯 소식이 끊어졌었으나, 2017년 효리네민박 시즌1을 시작으로, 2018년 효리네민박 시즌2, 2019년 캠핑클럽, 2020년 싹쓰리와 환불원정대, 2022년 서울체크인까지, '평균 1년에 1편 정도' 예능 방송에 출연해 이효리를 그리워하는 팬들을 안심시켜주고 있다.

2018년 사드 배치 문제로 중국인 관광객이 급감하며, 제주도 관광업계에 비상이 걸렸었으나, 효리네민박(2017~2018)이라는 이효리의 예능 방송의 영향으로 제주 관광객이 100만 명 증가했고, 이로인해 제주도에 생산유발효과가 6251억 원이 발생했다는 한국은행의 제주 경제효과 보고서(2019.1.8)가 작성되었다고 한다. 2019년 캠핑클럽 예능 방송을 통해 핑클 멤버들과 모여 완전체를 이루었고, 이 영향으로 흩어졌던 핑클의 팬들 일부가 결집해서 핑클을 위해 1년에 한번씩 데뷔를 기념하는 지하철역 전광판을 설치하고 있다. (# 핑클 활동과 # 여담을 참고) 2020년 놀면 뭐하니? 예능 방송에서 싹쓰리와 환불원정대 멤버로 활약하면서, '혼성그룹으로', '40대의 나이로;, '2020년대에도' 가요계에서 1위를 했다는 기록이 생겼고, 패밀리가 떴다 때에 '국민 남매'라고 불렸음에도 얻지 못했던 '베스트 커플상'을 수상하며 유재석과 이효리의 캐미를 대중들에게 각인시켰다. (뮤직&토크 부문 여자 '최우수상')

2020년 싹쓰리의 린다G 활약에 힘입어 '효리 효과'를 소개하는 유튜브 영상도 제작되어 화제를 모았었다. (# (핑클부터 환불원정대까지 '효리 효과' 22년(영상)))(# (그 시절 이효리의 엄청난 영향력(글))

2021년 MAMA에 호스트로 초청받아 스우파와 함께 무대공연을 연출하였다. (2008년 MKMF 때 빅뱅과 함께 무대를 연출했던 이후 13년만인데, 여성 호스트가 초청받은 건 역대 '최초'라고 한다.)

2022년 국내 OTT 티빙에서 서울체크인 방송을 촬영했는데, 파일럿 방송이 티빙 서비스 이래 역대급 시청 UV(방문자수)를 기록하더니(유료가입자 기여도 1위), OTT의 예능시대를 선도하는 등 큰 활약을 하며, 아직도 여전한 이효리 브랜드의 위상을 과시했다고 한다. # 매일경제 (이효리의 '서울체크인', 유료가입기여지수 + 시청 UV 1위) (2022년 6월 6일 기사)

예능을 '취미'삼아 조금씩 출연하고 있는데, 출연할 때마다 업적 같은 게 하나씩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효리 예능

할 말은 하고 보는 시원한 성격과 유재석, 신동엽 등 최고의 파트너 MC의 멘트에도 밀리지 않는 타고난 순발력, 슈퍼스타임에도 불구하고 몸을 사리지 않는 솔직함과 털털함으로 핑클 시절부터 40대가 된 지금까지도 역대 여자 가수 중에서 넘사벽의 예능감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2000년대 여가수로서는 보기 드물게 예능 MC[]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최고의 전성기 때는 패밀리가 떴다로 2009 SBS 연예대상에서 유재석과 함께 대상을 공동으로 수상하기도 했다.[

핑클시절부터 예능업계에 '핑클 효과'[]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출연만하면 시청율을 높여주고, 방송의 재미를 빵빵 터뜨리는 예능돌로 유명했었다.[] (일은 잘하는데 컨트롤이 어렵다는 90년대 아이돌 그룹의 쌍두마차로 보이그룹에 신화, 걸그룹에 핑클이 유명했었다.)

이효리의 MC 첫 도전은 KBS2의 해피투게더였는데, 처음으로 호흡을 맞췄던 신동엽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능수능란하게 19금 농담의 선을 아슬아슬 타고 넘는 순발력을 익힌 것. 여기에 일반적으로 여성 연예인이 꺼내기 힘든 '생리' 등의 단어를 불쾌감 없이 입에 담아 웃음을 만들어냈다. 당당하고 당찬 알파걸의 이미지와 털털하고 수더분한 모습을 동시에 갖춘 이효리가 신동엽이 가진 순발력을 익혀 시너지 효과를 이뤄낸 것. 이후 유재석과 호흡을 맞추면서 그의 진행 능력을 흡수했고, 뛰어난 예능감과 순발력, 진행 능력을 동시에 갖춘 MC로 거듭났다. 

또한 특징으로는 신규 예능 프로그램의 1회 게스트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 이효리의 화제성 덕에 첫 화부터 시청률을 잡을 수 있으며, 방송감이 뛰어나기 때문에 1회에 나와서 프로그램의 틀을 잡아주는 효과까지 있다. 야심만만 예능선수촌, 하하몽쇼, 런닝맨, 김제동의 톡투유 시즌2, 박진영의 파티피플, 일로 만난 사이, 먹보와 털보 등 여러 예능 1회에 출연해서 여러 번 하드캐리를 한 경력이 있으며 이효리 본인도 자신을 '1회 전문 게스트'라고 할 정도이다.

특히 함께 대상을 받아본 적이 있는 유재석과 호흡이 잘 맞아서 '국민 남매'로 불리운다. 유재석과는 그가 자유선언 오늘은 토요일에 메뚜기 탈을 쓰고 다니던 시절, 핑클과 함께 통영으로 촬영을 갔던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당시 유재석이 매니저나 코디도 없이 혼자 메뚜기탈을 가방에 구겨넣고 다니면서, 한편으로 서툰 진행 탓에 PD에게 혼나고 혼자 위축되어 있는 모습이 엄청 가엾고 못 미덥게 다가왔다고. 이효리 말로는 아마 그래서 유재석이 '국민 MC 유느님'이라 불리게 된 오늘날까지도 자기는 유재석을 별로 어려워하지 않고 할 말을 하는 모습이 나올 수 있는 거라고 한다.[]

이효리의 예능 전성기는 2008년~2010년 패밀리가 떴다로 대표할 수 있다. 이미 이 당시에도 가요대상을 7차례 수상하고, '최우수 모델상'을 수상했으며, 굳이 수상 자료가 없더라도 다방면에서 큰 활약을 하며 대한민국 연예계에 '슈퍼스타'로 공인된 상태였었다. 2008년 Mnet의 '오프 더 레코드 - 효리' 편에 출연하는 것만으로도 '당대 탑스타의 출연' 이라는 말로 화제를 모았었던 적이 있었는데, 패떴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해피투게더에서 호흡을 맞췄던 유재석과 함께하면서 이미 대중들의 기대감은 만발했었다. 이효리의 예능감이야 '그동안 보여줬던' 것들이 있었기에 어떤 멤버들과 어떤 내용으로 연출의 방향을 정하는지 기대를 모았었다. 방송 초기에는 1박 2일과 다를 게 없는 포멧이라며 비난을 받기도 했었지만, 몸을 아끼지 않는 슈퍼스타의 몸개그와 유재석과의 캐미, 이천희, 박예진, 김수로, 대성, 윤종신 등과 잘 어울어져 평균 시청률 25%(최고 시청률 30%)을 기록하며 주말 저녁 시청률 1위를 반년 넘게 유지하는 쾌거를 달성했었다.

2012년에는 채식주의와 동물 보호를 대표하는 연예인이 된 이효리가 '소셜테이너 이효리의 일상과 솔직한 속내를 담은 리얼리티 프로그램' 이라는 소개문구와 함께 대중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함께 선사하는 '이효리의 소셜클럽 골든12' (Onstyle, 2020년 현재는 Mnet)를 선보이며 큰 호평을 받았고# (버스커 버스커 '장범준' 신인 가수 데뷔 시절, 이효리 누나 '유고걸'을 기타로 치다) , 2013년에는 결혼 직전에 '소속사 후배 걸그룹' 스피카를 챙겨주는 '이효리의 x언니' (Onstyle, 2020년 현재는 Mnet)를 선보이며 호평을 이어갔었다. '올해로 데뷔 15년차를 맞는 섹시디바 이효리가 후배가수에게 치열한 가요계에서 살아남는 비법을 전수하기 위한 특별한 트레이닝 과정을 담은 리얼리티 프로그램' 이라는 소개문구의 방송으로, 아이돌을 꿈꾸거나, 아이돌을 관리하는 업계 관계자들에게도 참고지침처럼 활용될만한 내용이다. (중간중간 이효리&이상순 예비 부부의 꽁냥대는 행각을 보는 재미도 솔솔하다. # 꽁냥꽁냥, # 이상순의 프로포즈, # 이효리의 프로포즈 )

2014년 시사토크 매직아이의 진행을 맡았지만, '이효리' 혼자만 돋보이고, 나머지 보조 진행자들의 존재감이 없다는 평과 함께 4개월만에 조기종영되었고, 이와 함께 이효리의 연예계 행보도 끊어지게 되었다. (무한도전 토토가 방송을 위해 유재석과 정형돈이 제주도에 사는 이효리의 집에 방문했을 때 '콩농사'를 짓고 있는 이효리의 모습 때문에 대단히 화제가 되었다. 방송의 재미 또한 상당해서 '무한도전' 하면 빠지지 않는 에피소드 중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

2017년, 이효리가 오랫만에 6집 앨범을 준비하면서 '앨범 홍보의 성격'으로 예능 방송에 출연했었는데, 출연한 모든 예능이 높은 시청률과 화제성을 기록하며 대중들과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 '역시 이효리' 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효리네민박 이라는 고정 방송은 시작 전부터 '삼시세끼', '윤식당'과 비교되며 많은 우려를 받았지만,# (외모 걱정인 효리에게 상순 "민박집이나 합시다!") 막상 방송이 나오고보니 우려를 불식시키는 것 이상으로 대단히 높은 '시청률'과 '화제성'을 기록하며, 패밀리가 떴다 이후 예능인 이효리의 역량이 다시 부각되기도 했었다. # (미디어스 '효리네 민박'은 연애버라이어티? 이토록 설레는 예능이라니) 2017년에는 여름을 배경으로, 2018년에는 겨울을 배경으로 시즌 2까지 확장되어 방영되었고, 2019년에는 캠핑클럽이라는 방송을 통해 '완전체 핑클'의 이야기를 보여주며 큰 호평을 받았다. (특히 이 시기에 멤버들이 흩어져서 활동하고 있었던 2세대 걸그룹 '소녀시대' 멤버들이 이 방송을 시청하며 '감상평'을 나누는 등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었다.)

2020년에는 패밀리가 떴다 시절에도 프로그램의 투톱으로 여겨졌으며 유재석의 프로그램에 출연할 때마다 보여주었던 훌륭한 파트너십을 다시 보여주었다. 유재석 원톱 프로그램인 놀면 뭐하니?에도 2020년에 싹쓰리 멤버로 출연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더니, 다음 프로젝트에는 아예 환불원정대를 직접 조직해서 연속으로 대박을 터뜨렸다. 두 프로젝트 모두 이효리가 주축이 되어 진행된 프로젝트이니만큼, 놀면 뭐하니?의 2020년 5월부터 10월까지는 이효리가 전속 출연하며 시청률을 견인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효리 출연 전 놀면 뭐하니?의 시청률은 1부 5%, 2부 7% 정도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싹쓰리 때는 1부 7%, 2부 9%로 올랐고 환불원정대는 1부 9%, 2부 12%까지 올랐다. 음원도 대박이 나서 두 프로젝트 모두 음원 사이트 1위를 석권했다. 이러한 이효리의 활약을 인정받아 2020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뮤직&토크 부문 여자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코로나19에 대한 우려 때문에 연말 시상식에는 참석할 수 없었지만, 영상편지를 통해 이불 드레스를 선보여 큰 화제를 모았었다. (이듬해인 2021 MBC 방송연예대상에서는 유재석과 함께 대상 시상자로 나섰다.)

2022년 티빙의 오리지널 콘텐츠 '서울체크인'이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어내는데, '국내 OTT'에 처음으로 시도된 '예능 파일럿'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OTT의 예능시대(이하 OTT 예능)를 선도하였다. 방송업계에 따르면 '서울체크인'은 파일럿 방송이 공개된 이후 '티빙 유료가입자 기여도' 1위를 기록. 공개 3일만에 티빙의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환승연애'와 '술꾼도시여자들'의 시청 UV(방문자수)를 넘어서면서 단시간에 역대급 성적표를 받았다고 한다. '2022년 티빙 유료가입기여 1위'라는 성적표를 기록하면서 '서울 체크인'은 정규 편성으로 방영되기로 하였다.

 

이효리 뮤지션으로서의 특징

예나 지금이나 가창력이나 춤이 뛰어난 가수는 아니다. [] 본인도 이점을 잘 알고 있는데, 예능 프로그램에서 심심하면 자폭 개그 소재로 써먹으며 쿨하게 인정하는 편이다. [] 핑클 노래를 가만히 뜯어보면 위로 치솟는 고음 부분은 당연히 넘사벽 옥주현이 부르지만 특징적인 부분, 그러니까 훅 내지는 펀치라인은 주로 이효리가 맡았다. 음역대가 좁다는 게 최대의 단점이지만 딱 본인 음역대에 맞는 부분에서는 곡을 괜찮게 표현해 낸다.

데뷔 초 보컬로서는 핑클 시절에는 넘사벽급인 옥주현에 비해 확연히 실력이 부족했고, 본인도 "유리나 진이보다는 나았기에 2번째 비중을 받았다."고 했을 정도로 대단치 못한 수준이었다. 다만 활동이 지속되면서 고음역대 위주로 비중을 집중받는 옥주현에 비해 중음역대 알토를 맡은 이효리의 음색을 좋아하는 이들도 생겼고 본인 파트는 곧잘 소화해 냈다.[]

솔로 데뷔 이후에는 혼자서 한 곡을 소화해 내야 하는 만큼 라이브가 상당히 불안정했다.[] 본인도 힐링캠프에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 무대에 올랐다."고 할 만큼 실망스러운 공연을 한 경우도 있었다. 사실 이때까지는 정말로 '외모와 춤으로 밀어붙이는 가수'였고, 보컬로서 뭔가를 가늠할 수준은 아니었다. 활동 초기에 무대를 립싱크 위주로 선보여 비판을 많이 받았다.[]


변화가 감지된 것은 3집 때부터로, 라이브에서 음이탈이 나 호흡 실수를 일으키는 경우도 거의 없어진 데다, 심지어 악명 높은 MR 제거 영상에서도 비난을 받지 않는 실력 성장을 보였다. 본인의 음역대와 음색을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곡에 대한 밀착도도 높아진 편. 4집 앨범도 표절 시비가 터지기 전에는 'Want Me Back'처럼 상당히 호평을 받은 곡도 있었다. 다만 소리 끝을 레이백하는 안 좋은 습관이 남아있다거나 하는 단점은 남아있었으나, 핑클 시절과 비교하면 다른 사람 수준. 5월 22일 엠넷에서 방영된 컴백쇼에서 예전 히트곡들을, 특히 텐미닛을 부를 때는 고음은커녕 호흡도 버겁던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라이브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효리의 가창이 이렇게 안정적으로 변한 건, 고음역대에 대한 고집을 버리고 중저음대에서 음색을 살리는 선곡으로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억지로 나오지 않는 고음을 넣지 않고, 대신 중음역에서 감정 표현했다, 그러니까 노래로 연기하는 데 집중한 것.[]

사실 솔로 데뷔곡 사실 '10 Minutes' 때부터 이효리는 순종적인 여성상하고는 거리가 멀었지만, 3집에서부턴 '페미니즘적 코드'를 본격적으로 차용하기 시작했다. 'U-Go-Girl'에서 여성들에게 능동적일 것을 종용하고, 남성들을 위한 상품화가 아닌 알파걸로서 정체성 굳히기에 들어간 것. 원래 엠넷미디어 측에서 타이틀곡으로 내정했던 'Hey Mr. Big'과 비교하면 메시지성의 차이는 더 두드러진다.[] 3집 수록곡인 'Lesson'도 비슷한 맥락에서 '언니가 한 수 가르쳐 줄게'라는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68혁명을 시작으로 했던 20세기 포스트모던 여성운동은 성적해방이 주류였다. 미니스커트가 한때 여성의 상징이었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2010년대 중반 여성 운동이 기존 사회의 유교 관념과 복잡하게 얽히면서 폐쇄적 성관념을 추구하는 한국이 독특한 케이스이며, 이효리는 이에 얽매이지 않고 20세기 서구에서 유행하던 당당한 여성상, 알파걸 이미지를 내세우던 팝스타들을 벤치마킹한 것.

5집 선공개 곡인 '미스코리아'에서는 락적인 창법을 차용해서 칼칼하게 부르는 시도를 보여주기도 했다. 롤러코스터의 리드보컬 조원선과 매우 흡사한 창법인데, 아마도 롤러코스터의 기타리스트인 남편 이상순의 영향인 모양. 게다가 가사는 외모지상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경계고, 타이틀곡인 'Bad Girls'는 말 잘 듣는 순종적인 여자에 대한 안티테제다. 뮤비에서는 대놓고 자기를 음흉하게 쳐다보는 남자들을 응징하는 장면도 적지 않게 나오며, 개성을 무시하는 사회에 대한 풍자도 포함하고 있다. 비록 상업적 가수로서 온전한 페미니즘, 혹은 진보적 담론을 다루지 못하고 아직 주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오버그라운드에서 이 정도라도 시도하는 뮤지션이 극히 드물고, 거기에 대중적 지지까지 같이 얻은 건 이효리가 유일하다. 또한 선공개 곡 '미스코리아'에 가려져서 그렇지 5집 수록곡들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5집의 마지막 트랙에 수록된 '노'의 경우에는 이효리가 이전에 단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특이한 노래로 묘하게도 장필순, 이상은의 몽환적 느낌을 닮았다는 평가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촛불 정국 시기 이승환-이규호의 프로듀싱으로 발표된 곡 길가에 버려지다에서는 당대의 보컬인 이승환 전인권과 함께 걸출한 보컬을 선보였다.

아이돌 그룹 서브보컬로 시작해서 그럴싸한 솔로 뮤지션으로 성장 중인 몇 안 되는 케이스.[

결혼을 전후해서는[] 본격적으로 작곡가 겸 작사가로 활동하고 있다.

싱어송라이터 이효리에 대해서는 아직 신인이니만큼 이렇다 할 평가를 내릴 시기는 아니지만, 이효리 특유의 '촉' 이 살아있다는 평가를 받는 중. '미스코리아'와 'You Don't Love Me' 모두 후렴이 훅(귀에 감기는 선율)이 훌륭하다는 평. 훅을 만드는 것은 배워서 되는 게 아닌, 작곡가의 재능과 연결된 부분이니만큼 싱어송라이터 이효리에 대해 기대할 만하다는 듯.

작사가로서의 능력은 작곡 능력보다 높게 평가받는데, 작사는 핑클 시절부터 작업해 왔다. 핑클 2집 수록곡 'Still In Love'와 핑클 4집 타이틀곡 '영원', 수록곡 '그대 안의 나'가 바로 이효리가 작사한 곡이다. 이후 본인의 솔로곡을 다수 작사했으며, 20년에는 음원 차트를 휩쓴 히트곡인 다시 여기 바닷가를 작사했다.

이효리의 영향 덕분에 요즘에도 아이돌 출신 솔로 여가수가 나오면 제2의 이효리[]로 꾸준히 언급되지만 이효리만 한 커리어나 대중성을 가진 여가수는 아직 나오고 있지 않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