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가수.
2000년대 초중반 대한민국 가요계에서 대중적인 음악으로 전 연령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이끌었던 SG워너비의 전 리더이자, 서브보컬을 맡았었으며[], 그룹 탈퇴 후 솔로로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1981년 6월 23일 서울특별시 강서구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경제적으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살던 지역이 그린벨트에 묶여있었고 집은 흙으로 지어져서 일어나보면 염소가 문의 창호지를 뜯어먹고 있을 정도로 열악했다고 한다. 또한 6살 때 심실 중격 결손증(VSD)[5]으로 인해 수술을 받는 등 선천적으로 약한 몸 때문에 고생 많던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
2000년 12월, 서울예대 방송연예과 00학번으로 재학 중일 때, 기획사 관계자들과 작곡가들이 찾아와서 재학생들의 실력을 본 적이 있었다고 한다. 친구가 오디션 보는걸 옆에서 지켜보던 중 한번 노래를 불러보라는 김형석의 말에 임창정의 '날 닮은 너'를 불렀는데, "내일부터 나와서 연습해라"라는 말과 함께 덥썩 합격했다고. # 정작 본인은 그렇게 잘 부른 건 아닌 거 같았다고 생각했는데 엄청난 극찬을 받아 오히려 당황했었다고 한다.
가수 활동
지패밀리엔터테인먼트에서 약 2년간의 연습 기간을 거친 뒤[6] 2002년 「Gloomy Sunday」라는 타이틀곡으로 데뷔하였다. 데뷔 무대는 12월 14일 윤도현의 러브레터. 그 후 후속곡 「차마」로 방송활동을 하다가 소속사인 지패밀리 엔터테인먼트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솔로 1집 활동을 마무리한다. 여담이지만 데뷔 앨범이 당시 음반 판매량 순위 차트에서 40위권에 랭크되어 있었다는 점을 미루어 보면 신인치고는 꽤 인기가 많았다.[] 소속사의 부도로 인해 얼마 활동하지 못 했다는 게 아쉽다는 점. 당시 활동 영상을 유튜브에 찾아보면 있다.[]
이후 GM기획으로 이적해 솔로 준비를 하다가 김용준과 듀오로 활동하는 플랜으로 변경이 되고, 마침내 김진호까지 들어오면서 3인조 보컬그룹 SG워너비가 결성이 된다.
2004년 타이틀곡 「Timeless」을 앞세운 데뷔앨범 《WANNA BE+》의 성공과 2집의 「죄와벌」, 「살다가」, 3집의 「내사람」 등 연이은 히트로 SG워너비는 가요계 정상에 오르며 앨범 판매량 1위, 골든디스크 대상 2회, MKMF 대상 수상 등 그야말로 고공행진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맏형으로 팀의 리더 및 서브(메인)보컬을 맡고있던 채동하는 SG워너비의 얼굴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애절함이 묻어나는 특유의 음색과 잘생긴 외모로 큰 인기를 얻었다.
4년간의 활발한 활동을 뒤로하고, 2008년 1월 26일, 일본 포니캐년 본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공식적으로 SG워너비에서의 탈퇴를 발표, 그해 3월 조영수의 'All star' 앨범 참여를 마지막으로 탈퇴하였다. 정확히는 2007년 추석 즈음에 재계약에 관련한 이야기들이 나왔고, 그 조율 과정에서 추후 활동에 대한 의견 차이를 확인하고 내부적으로는 SG워너비 탈퇴를 결정했었다고 한다. 2008년 2월에 엠넷에서 방송된 'SG워너비 도쿄스토리'에서 한 인터뷰에 따르면, 1월에 이미 소속사와 법적인 계약은 이미 끝난 상태였으나 소속사 사장과 본인이 생각하는 SG워너비의 몫을 채우고 나가길 원했기 때문에 5월까지 스케줄을 소화했다
한국에서 마지막 무대는 2008년 4월 27일의 「보고싶어」 무대였지만[9], SG워너비로써의 마지막 공식 스케줄은 2008년 5월 8일에 일본 도쿄에서 열린 콘서트 <My Friend Forever>였다.[10] (엔딩 멘트) 팀을 탈퇴하는 과정에서 감정적으로 사이가 틀어지거나 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고 하는데, 이를 증명하듯 탈퇴 이후인 6월에 열린 SG워너비 울산 콘서트와 서울 콘서트에 게스트로 참여하기도 했다.
탈퇴 이유에 대해선 2008년 SG워너비가 출연한 라디오 스타에서 멤버 김용준이 '꿈이 있어서 나갔다'라고 짤막하게 언급했고, 채동하 본인도 또 다른 꿈을 이루기 위해 탈퇴를 결심했다 말한 바 있다. # 소속사는 SG워너비 활동에 전념하기를 바랬던 반면 채동하는 연기 활동을 원해서 팀을 나간걸로 한동안 알려졌었지만, 이건 순전히 회사의 언플이였다.[] 당시 채동하는 탈퇴에 관한 여러 루머에 대해 "연기자 활동만을 하기 위해 이적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며 못 박았다. 뒤늦게 인터뷰에서 털어놓길, 실제로 채동하는 탈퇴 이후 가수 생활을 그만두려고 했다. SG워너비 활동시절의 살인적인 스케줄과 더불어 앨범 성적에 대한 부담감에서 오는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컸기 때문. 하지만 뮤지컬 무대에 서며 다시 마이크를 잡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이후 2집 《Essay》로 컴백하려 했으나, 8월 29일 쇼케이스를 앞두고 연습하던 중 목 디스크 판정을 받고 성대결절까지 겹쳐 활동을 연기했다.[] 당시 소속사 관계자는 채동하가 SG워너비 탈퇴 이후 "1년 4개월 만에 나오는 거라서 부담감을 많이 가졌다"며 "거의 신인처럼 트레이닝을 하면서 준비했는데 안타깝다"고 전했다.
2009년 11월에 늦게나마 컴백을 했음에도 또 목 디스크가 발목을 잡아 방송 활동을 많이 못했다. 타이틀곡 「어떻게 잊겠습니까」의 퀄리티는 좋았으나 준비한 만큼의 활동은 못한 편이다. 음반의 판매량 자체는 나쁘지는 않았으나 작곡가인 조영수가 초대박일 거 같다고 예상한거에 비해 기대에 못 미쳐 아쉬움이 남았다.
특이하게 이 앨범은 에세이 형식으로, 채동하 본인이 직접 작사, 작곡한 곡들[]과 직접 쓴 수필이나 심정들이 적혀 있다. 10년 전부터 써오던 일기장에서 발췌한 내용이 주였는데, 어릴 적 이야기와 SG워너비의 리더로써 겪어야 했던 심적 부담감 등 다양한 얘기가 담겨 있다.
2집 활동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약 두달 간 인도와 네팔에서 체류하며 마음을 다잡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이때 인도에서 본 한 장례식 풍경에서 화장 연기로 노랗게 물들은 하늘을 보고 마치 '바닐라 스카이'같다는 생각이 들어 즉석으로 노랫말을 지었던게 그 다음 타이틀곡의 유래.
2010년 9월 발매한 미니앨범 《D-Day》는 채동하의 손길이 많이 간 앨범으로, 프로듀싱까지 도맡았다. '발라드의 멜로디, 록의 리듬, 클래식의 과감함, BPM 147을 한 노래에 섞은' 「Vanilla Sky」는 자작곡이기도 했다. 역시 그렇게 오래 활동하지는 않고 들어간 편이였으나, 그래도 2집 《Essay》보다는 비교적 활발하고 오래 활동하여 채동하를 기다려온 사랑하는 수많은 팬들의 성원에 보답을 해냈다.
2011년 1월, V.O.S에서 탈퇴했던 전 리더 박지헌[]과 '옴므듀엣'을 결성[], 「어제 같은데」라는 싱글을 발표하고 한국에서는 각종 행사로, 일본에서는 콘서트로 점점 활발하게 활동해 나가며 다시 열심히 앞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었다.
사망
2011년 5월 26일[],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 S아파트의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타살 흔적은 없으며 사인은 자살. 자살 동기는 우울증으로 보인다고. 실제로 2009년 7월 9일, 채동하가 잘 따르던 매니저 장 모 씨가 자살로 숨졌고[], 본인이 열심히 작업한 앨범은 건강상 문제로 기대에 못 미쳤으며 앞으로의 활동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이 컸다는 점이 채동하를 괴롭힌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사망 다음 날인 5월 27일은 일본 도쿄에서 공연하는 날이었으며, 이 시기에는 일본 프로모션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채동하의 일본 측 소속사에서 공연이 얼마 안 남았는데 채동하와의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했다. 입국한 사실도 소속사에 알리지 않았으며 수 차례 연락을 했음에도 받지 않았다. 이에 그의 매니저가 자택을 방문하였고 아무런 인기척이 없어 119에 신고, 구조대가 출동하여 베란다를 통해 들어갔으나, 안타깝게도 명을 달리한 상태였다. 평소에 그를 본 사람들은 짧은 외출에도 단정했으나 자살 며칠 전에는 단정한 모습과는 달리 초췌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당시 기준으로 한달도 안 남은 채동하의 생일에 맞춰 미니앨범 쇼케이스와 팬클럽과 함께 하는 생일파티 등이 이뤄질 예정이었다.
연락이 닿지 않는 와중에도 콘서트 준비는 속행되었고, 공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서야 소식을 들은 일본 측 스태프들은 입장만 기다리고 있던 수백 명의 팬들에게 채동하의 자살 소식을 그 자리에서 그대로 전달해야 했다. 공연은 생전 SG워너비 활동과 일본에서의 활동을 담은 영상들을 편집해서 상영했고, 관련 스태프들이 모두 무대 위로 올라와 추도문을 낭독하는 등 추모형식으로 진행되었다. 팬층이 거의 30~50대 여성이라 눈물바다가 되었지만 다행히 큰 소란은 없었고 조용히 공연은 막을 내렸다. 팬카페에 며칠 전에 올라왔던 밝고 기대감 넘치는 글이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으며, 더욱이 그의 사망 소식과 더불어 기부, 봉사 등 각종 선행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더욱 더 많은 이들에게 안타까움을 주었다.[]
소속사에선 채동하의 추모 앨범이 계획되어 있었고, 생전에 작업했던 데모곡 「눈이 기억하는 사람」을 발표한다는 기사가 있었다. 시간이 흘러 잊혀진 것을 보면 오보일 가능성도 있고, 질문한 흔적만 있다. 답변에 의하면 유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채동하의 죽음에 대해 전 소속사 김광수 대표는 안타깝다며, 팀을 떠난 지 6개월 정도 지나 채동하가 찾아왔을 때 ‘언제 SG워너비로 다시 한번 뭉쳐보라’고 제안하자 긍정적인 반응이었다"면서 ‘팀을 나가보니 소중함을 알겠더라’고 했다"고 전했다. 이는 고인에 대한 예의는 갖다버린 언플이였고, 김광수의 만행을 아는 팬들을 그야말로 피꺼솟하게 만든 발언.
사후
그 해 11월, SG워너비 'THE LAST' 콘서트에서 「아리랑」의 후반부 '보고싶은 내 사랑아' 파트에서 그의 음성이 나오기도 했다.
2013년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서 김진호가 고인이 된 채동하에 대해 입을 열었는데, "여자 친구처럼 세심한 부분까지도 날 걱정 해 주던 형이었다. 그런 형의 죽음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특히 형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내게 크나큰 충격이었다"는 말을 남겼다.
그해 10월 12일 방송된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에 첫 출연한 김진호를 통해 잊혀가는 줄만 알았던 채동하가 다시 기억되게 된다. 이날 김진호는 추모 특집으로 채동하를 추모하며 SG워너비의 히트곡 「살다가」를 열창했다. # "우린 마지못해 웃는 거겠지, 우린 마지못해 살아가겠지" 파트에서 진짜 채동하의 육성이 나오면서 감동이 더해졌다. 또한 노래가 멈춘 후 과거 채동하가 김진호에게 해줬던 말이 김진호 뒤 화면에 나오는데, 이때를 기억하던 팬들에 큰 슬픔을 안겼다.[] 김진호는 최종적으로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방송이 끝난 후에도 각종 음원 차트 상위권에 이번에 부른 「살다가」가 1위를 찍고 채동하가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는 등 다시 사람들에 기억에 남겨지게 되었다.
이때 방송에서 당시 같은 소속사였던 강민경이 말하길, 채동하는 자신과 이해리에게 조언을 제일 많이 해주고 챙겨주었지만, 동시에 가장 많이 혼냈던 선배였다고 한다. 영상 9:00부터 또한 채동하가 세상을 떠난 뒤에 김진호가 정말 많이 힘들어했다고. 불후의 명곡 우승 인터뷰 때 김진호에게 채동하에게 한 마디 할 것을 요청했더니, "아... 이건 너무 잔인한데요."하면서 괴로워했을 정도였다.
2021년 4월 17일 놀면 뭐하니?에 SG워너비의 출연으로 큰 화제가 된 이후, 예전 곡들이 음원차트를 석권하며 덩달아 채동하도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회자되었다. 이중 가장 순위가 높은 건 데뷔곡 「Timeless」인데, 1집의 앨범 커버가 채동하의 옆모습이라 세상을 떠난지 정확히 10년이 되는 해에 SG워너비의 '재주행'을 함께하는 듯해, 그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에게 애틋함을 안겨줬다.
보컬 실력
살아 생전 가창력을 살펴보면, 굉장한 가창력의 소유자이다. 「Gloomy Sunday」로 데뷔하던 1집 때부터 김형석 작곡가가 말하길, 박효신과 조성모의 장점을 합쳐놓은 듯한 느낌이라고 극찬했다. 작곡가도 조성모의 여러 히트곡을 썼던 이경섭 작곡가가 1집 대부분의 곡을 작곡했을 정도이다.
SG워너비에서 상당히 비중이 큰 보컬이였다. 특히 채동하 보컬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처연한 음색은 2004~2007년 SG워너비의 정체성이였던 절절한 노래들을 잘 드러낸 요소이기도 하다.
김진호가 워낙 파트가 많고 폭발적인 애드립을 자랑하기에 팬이 아닌 사람들은 채동하의 실력을 잘 모르고 넘어갈 수 있으나, 저음부터 고음까지 아우르는 넓은 음역대, 감미로운 음색, 안정적인 발성, 훌륭한 성량, 애절한 감정표현 등 모든 면에서 상당히 뛰어났다. 저음에서는 허스키한 쇳소리, 고음에서는 맑고 고우면서 힘 있는 미성이 특징.[] 「어제 같은데」에선 진성으로 3옥타브 미(E5)까지 올라간다. 그 외의 음역은 고음/노래 목록/국내에서 확인 가능.
메인보컬로서 파트는 상당 수 김진호의 담당이였으나 라이브 무대에서는 음원에서의 기존 파트 배분과 다르게 하여 후렴구를 불러서 채동하도 메인보컬의 면모를 보여주었고, 아예 채동하가 녹음 버전 곡에서도 후렴을 맡는 곡들도 있다. 탈퇴 후 2집의 「광」을 혼자 부를 때 김진호의 "못 이기는 척 해 한 번만 내게 져주면 돼" 부분을 진성으로 부르기도. 채동하가 탈퇴한 뒤, 채동하의 고음 파트를 맡을 사람이 없어 더 이상 라이브로 들을 수 없는 곡들이 몇개 있는 것만 봐도 채동하가 차지했던 팀내에서의 비중을 잘 알 수 있다.[]
다만 선천적으로 앓던 천식 등 컨디션에 따른 기복도 좀 심했던 편이라, 몸이 안 좋을 때는 음정이 불안해지던게 단점. 여기에 전성기 SG워너비는 워낙 콘서트와 행사 등에서 굴려지며 혹사당한것도 한몫했다. 채동하가 콘서트 도중 무대 위에서 쓰러진게 여러번이라는 팬들의 증언을 찾아볼 수 있다. 또 한가지 특징은 약간 새는 듯한 발음[24]인데, 이는 청취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편.[]
SG워너비 3집부터 음원과 라이브의 차이가 더 뚜렷한데, 이는 음반 프로듀싱 단계에서 김진호의 두꺼운 목소리를 부각시키기위해 다른 두 멤버의 파트를 줄이고 미성을 강조하도록 디렉팅했기 때문이다.[] 음원과 달리 라이브에서는 보다 힘차고 파워풀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이 목소리가 채동하 본연 스타일에 가깝다. 대표곡들인 3집 '내 사람', 4집 '아리랑' 고음 파트만 들어봐도 라이브와 차이가 크다. 다만 SG워너비를 탈퇴하고 발매한 솔로 2집에선 미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프로듀서 조영수의 취향[]인 듯하다.
사실 콘서트로만 보자면 본인은 개인 무대에서 록 장르의 노래들을 즐겨 불렀다.[] 2집 콘서트 개인 무대에서 마이클 잭슨의 「Dangerous」 무대를 한 적도 있고, 4집 콘서트 중에서는 본 조비의 「Complicated」를 불렀다.[] 저음부터 3옥타브가 넘어가는 고음까지 소화 가능하며, 록 스타일의 곡도 잘 소화하곤 했다. 본인이 좋아하는 스타일이기도 하며 콘서트에서 본 조비, 너바나의 곡들을 자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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