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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와 아이들 서태지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2. 8. 15.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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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가수. 1990년대 한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인 서태지와 아이들의 리더이자, 싱어송라이터이다. 건국이래 최대 규모의 10~20대 팬덤을 거느렸으며, 그들을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만든 업적으로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뮤지션 중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2022년 3월 23일 부로 서태지와 아이들로 데뷔한지 30주년이 되었다.

 

서태지는 90년대를 뒤흔든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의 리더이자 한국 힙합과 댄스 음악의[] 선구자로서 문화 대통령이라 불리는, 여러모로 한국 음악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대한민국에 랩을 정착시킨 선구자이자, 당시 중장년층들 위주였던 대중문화의 향유층을 청년, 청소년, 어린이들한테도 내려오게 만든 인물. 그만큼 당시 모든 젊은이들의 감각을 폭발적으로 요동치게 만들만큼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신선한 장르의 음악이었다.

댄스 음악의 경우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이전인 1980년대에도 나미, 김완선, 소방차, 박남정 등의 댄스 가수들은 분명히 있었다. 다만 대부분의 노래들이 현재 한국에서의 댄스음악과는 다르게 트로트와 같은 성인가요풍(소위 뽕삘)의 리듬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고전 유로비트를 섞은 리듬, 당시 일본에서 많이 쓰였던 시티팝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서태지의 등장 이후로 팝뮤직과 힙합을 기반으로 한 리듬의 댄스 뮤직 즉 현 시대의 한국 대중음악 스타일을 완벽히 정의했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힙합의 경우 서태지가 힙합크루를 만들고 활동한 정통 힙합래퍼는 아니지만 서태지의 랩으로 인해 '한국어로도 랩을 만들 수 있다[]', '한국에서도 흑인 음악 장르가 성공할 수 있다.'라는 생각이 전 국민적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서태지와 아이들의 랩뮤직이 전 국민적으로 크게 성공한 이후 랩과 힙합을 전문적으로 다룬 가수들이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하여 1990년대 후반 경부터 PC통신 유저들이나 교포출신들 사이에서 힙합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발전한 것이 현재 한국 힙합계의 시작이다. 타블로도 하여가 노래를 듣고 영향을 받았음을 무릎팍도사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즉, 한국 힙합계에선 서태지가 일종의 뿌리이자 자양분이 되어준 셈이다. 비유하면 비틀즈가 하드록이나 메탈 밴드는 아니지만 그들이 남긴 헬터 스켈터라는 명곡이 1970~80년대 하드록, 메탈 장르의 프로토타입을 개척한 것과 같은 거라고 볼 수 있다. 대표곡은 '난 알아요', '하여가', '교실 이데아', '컴백홈' 외 다수.

1990년대 초부터 다양한 장르의 음악 활동을 통해 한반도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의 청소년 팬덤을 거느렸으며, 이 힘을 밑거름으로 삼아 군사문화의 잔재가 남아있던 당대 권위적인 한국 사회에 음악적, 비음악적으로 전방위적인 영향을 끼치며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대중매체에서 이 아티스트를 소개할 때 들어가는 수식어 중 첫머리에 오는 머릿말은 단연 문화 대통령.[] 시대에 파란을 몰고 온 서태지와 아이들이 공식 은퇴를 선언한 1996년 이후 2013년 평창동에 정착하기까지 18년 동안 철저히 보통 사람으로 돌아가 기자들을 피해 해외에 거주해 왔다. 하나의 활동기가 끝나면 잠시 휴식하며 영감을 얻고, 음악작업을 하고, 귀국해 음반을 내고 공연을 하는 방식으로 솔로 활동을 했다. 앨범 간의 텀이 수년씩 되는 것은 매번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기 때문에 습득하고 체화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기도 하고, 음악작업에 있어서 지독한 완벽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1989년 80년대 메탈키드의 롤모델이었던 록밴드 시나위의 베이시스트로 아티스트 커리어를 시작했으며, 1992년 3인조 랩 댄스 트리오 서태지와 아이들로 오버그라운드에 데뷔하였다. 당시 이태원 클럽 음악으로 천대받던 댄스 뮤직을 대중에게 알리며 1집 타이틀곡 '난 알아요'로 17주 동안 가요 차트 1위를 수성한 전설적인 뮤지션. 이후 3인조 활동을 통해 힙합, 발라드, 일렉트로니카, 스래시 메탈, 갱스터 뮤직 등 매우 넓은 스펙트럼의 장르를 소화하며 음반을 발표하는 족족 사회에 신드롬을 일으켰다. 1998년 솔로로 전향한 이후에는 얼터너티브 락, 하드코어 펑크, 이모코어 등 본인의 전공인 록 위주의 밴드 사운드 활동에 매진해왔다. 이후 2008년부터는 고난도의 작법과 자신의 뿌리인 두 장르(록, 일렉트로니카)를 접목시키는 연구에 대한 성과물을 발표하고 있다.

작곡, 편곡 및 작사의 완성도와 음향 퀄리티, 공연장 사운드와 콘서트 무대 구성 등 음악적인 면에서 전방위적으로 깐깐한 완벽주의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일단 음악쪽을 보면 녹음을 마친 음반의 마무리 믹싱을 위해 6개월 동안 바깥세상과 단절한 채로 쌩고생을 하는가 하면 이미 발매한 음반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 앨범 활동이 끝나자마자 새로 녹음해 버리지를 않나, 또 아토모스 싱글 땐 자연의 소리를 잡겠다고 장비를 바리바리 싣고 산골 흉가를 찾아가 녹음 작업을 하질 않나, 또 그게 믹싱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정규음반 발매의 기회를 노리고 미국 스튜디오로 날아가 버리기도 하는 등 음악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국내 아티스트 중에 손에 꼽힌다.

앞서 짚은 대로 여러 장르의 크로스오버를 통해 만들어진 독특한 음악적 색채와 올라운드 싱어송라이터라는 점, 또한 '가수 서태지'라는 이미지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서태지는 음향 엔지니어링에도 조예가 깊다. 갓 20살 나이에 데뷔할 때 세션을 부르기엔 가난해서 1집의 엔지니어링과 프로그래밍을 도맡아 했는데, 이후에는 어쩔 수 없이 했던 일이 습관이 되어서 후엔 한국에 있는 자기 회사와 저택 안에 본인이 작업할 전용 스튜디오를 차리고 음악에 관한 모든 작업을 총괄했다.[] 현재는 자신의 일은 A부터 Z까지 모든 과정이 자기 손에서 이루어져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 되었으며, 콜라보레이션도 특별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외부 인물을 섭외하지 않는 한 자기가 다 알아서 하는 편이다.

또한 초상권 등을 포함한 가수들의 권리 안정과 수입 배분을 이끌어내는데 앞장섰던 가수인데, 서태지 이전에는 가수들의 음반이 아무리 많이 팔리고 TV에 많이 나와 노래를 부른다고 해도 자신의 수익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고 음반회사 및 기획사가 주는 대로 만족해야 했다. 연예인인데 차가 없어? 한 대 뽑아줘라, 수고했으니까 집 좀 좋은 데로 사줘라 이런 식이었다. 가왕 조용필과 마왕 신해철조차 이 흐름을 거스르지 못했지만, 생 초짜 신인 서태지가 이런 고일 대로 고여있던 기획사들의 횡포를 깨트리고 정당한 자신의 몫을 챙겼고 그 후 너도 나도 그런 행보를 따라가며 가수들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기 시작했다. 여담으로 이를 두고 신해철은 스스로를 '고뇌하는 비겁자[]', 서태지를 '거침없는 낙오자'라고 칭하며 '그렇기 때문에 서태지는 당당히 승리를 거둘 자격이 있고 나는 그를 이길 수 없다.'라고 언급하였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신해철 사후 서태지가 말하길 서태지가 방송국 PD등 업계의 관계자들과 싸우고 충돌하고 하는 것들은 당시 혈기 넘치던 20대의 신해철을 보고 배운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신비주의를 언급하면 반자동적으로 따라나오는 이름의 주인이 바로 이 사람. 데뷔 초에는 여러 쇼 프로그램에 출연해 말도 안 되는 몸개그를 선보이거나 음악방송에 출연해 간단한 토크를 하는 등 여느 가수들과 다를 바 없는 활동을 했지만 커리어 초반인 20살의 어린 나이부터 사생활의 일거수일투족을 캐며 자택을 24시간 포위하는 수백 명의 소녀 팬과 호시탐탐 먹이를 노리는 기자들, 음악밖에 모르는 방구석 청년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방송국 관계자들의 등쌀에 나가떨어져 점차적으로 신변잡기에 대한 입을 아예 닫아버리고 만다. 이것이 악순환의 단초가 되어 팬과 기자, 방송국 관계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슈퍼스타 서태지의 뒤를 캐거나 어떻게든 연락해 출연을 닥달하고 결과적으로 서태지는 더 꽁꽁 숨어야만 하는 무한루프를 만들어버렸다. 이 문제는 결국 그가 24세의 한창 어린 나이에 눈물의 은퇴를 선언하며 돌연 출국하고 세상에서 아예 증발해버리는 잔혹동화로 끝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내성적인 방구석 아티스트가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인기를 떠안았을 때 개인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고통을 겪을 대로 다 겪은 백전노장

 

창법

뮤지션으로서는 한국대중음악계 역사를 통틀어서 역대급 반열로 꼽히는데 비해 보컬리스트로서는 대중성과 거리가 멀고 그리 높게 평가되는 편은 아니고 실제로 당대의 신승훈, 김건모, 이승환, 김경호, 박완규와 같은 창법을 선보이는 가수는 아니다. 이를테면 서태지의 노래에는 스크리밍과 랩과 잔잔한 미성의 발라드 창법을 사용하였으며, 가창적 기술력으로 귀를 사로잡는 바이브레이션이 극히 적거나 아예 배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보컬의 역량을 최대한 잘 살리고 표현해내는 노래를 좋아하고 높게 평가하는 한국대중의 기호와는 사실 조금 거리가 있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서태지는 본인이 가진 단점을 장점으로 만들기 위해 가사 한절 한절에 발음을 어떻게 할지 등을 깊게 연구했다. 그래서 서태지 음악에 빠지면 그 목소리에 질리지 않게 된다. 본인의 목소리를 어떻게 사용해야할지 잘 알고 이를 활용한다. 서태지의 곡을 들으면 보컬인 서태지의 목소리 이상으로 세션의 연주가 전면에 부각되는 동시에 보컬과 연주가 절묘한 밸런스로 어우러져 서로를 살리고 있다는걸 느낄수 있다. 즉 보컬을 살리기위해 연주가 들어가는게 아니라 '보컬의 목소리도 악기의 하나'로서 다루는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원", "너에게" 등의 곡에서 보여주는 부드러운 미성, "Come Back Home", "슬픈 아픔" 등의 곡에서 보여주는 이죽거리는 듯한 보컬, "탱크" 등의 곡에서 보여주는 거칠게 목을 긁는 보컬, "필승", "울트라맨이야", "인터넷 전쟁", "Feel the Soul(대경성)", "Live Wire" 등의 곡에서 보여주는 절규하는 듯한 스크리밍, 샤우팅, 랩 등 여러 창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는데 이런 다양한 스타일의 서태지의 보컬은 노래를 더욱 다채롭고 개성있게 만들어 준다.

더불어 순수하게 보컬리스트로서 서태지의 매력이라면 바로 유니크한 음색의 미성. 특히 "내 모든 것"이나 "영원"같은 서정적인 곡에서 그 위력이 크게 발휘된다. 그리고 나이 마흔을 훌쩍 넘기고도 20대 초반시절에 가까운 미성을 유지하면서 3시간 넘게 공연하면서도 쌩쌩하게 노래할만큼 관리를 잘해온 것도 높게 평가받을만한 점.

위의 내용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서태지의 발성은 4집에서부터 완성되었다. 3집까지의 곡들을 들어보면 발성이라는 게 따로 없고 원래 목소리 그대로 고음이든 저음이든 불렀지만, 4집부터 특유의 콧소리를 섞어서 내는 발성을 기반으로 여러가지 창법을 내고 있다.

서태지보다 대중적인 가창력을 지닌 가수도 막상 서태지 곡을 부르면 느낌이 안 산다는 평이 나오는 경우가 많은게 바로 이런 이유들에 있다. 이 때문에 보컬 리스트로서의 서태지가 과소평가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정리하자면 분명 대중적으로 높게 평가받는 유형의 보컬은 아니지만 서태지 자신의 노래에 있어서는 최적의 보컬이라고 할 수 있을듯.

 

유년기

유년기의 서태지. 어린 시절 사진들은 눈이 작고 어쩐지 지금과 다른 모습이라 최수종 쇼에서 본인이 스스로 성형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가회동에서 아버지 정상규씨와 어머니 강명숙씨 사이의 1남 1녀 중 둘째이자 막내로 탄생. 누나로 정혜원씨가 있다. 청와대 근처의 소격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청와대와 아주 가까운 지역이라 민방위 훈련 때는 군인과 탱크까지 쫙 깔리는 살벌한 동네였다고 한다. 어린 시절 탱크를 따라다니면서 놀기도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RC카나 인형을 좋아했는데, 문구점에서 상습적으로 인형을 40개나 훔쳤다가 너무 대놓고 훔치는 서태지의 모습을 어이없이 지켜보던 문구점 주인이 참다 못해 서태지의 어머니께 그 사실을 알리게 되면서, 집에서 된통 혼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서태지의 '울트라맨이야' 뮤직비디오에 묘사되었다.

 

학창시절과 스쿨밴드 하늘벽

재동초등학교 재학 시절 음악보다는 과학을 좋아했고, 발명대회나 과학경시대회에서 상도 받을 정도여서,[] 주변에서 발명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본인 말로 초등학교 때는 공부를 잘했는데 중학교 시절부터 음악에 빠지면서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또한 학창시절 땐 동네에서 알아주는 노는 애였다고도 한다.

대동중학교[] 재학 시절 처음 음악에 입문하게 되었는데, 음악 그 자체가 흥미로워서라기보다는 길을 걷던 중 악기점에서 일렉트릭 기타를 우연히 보게 되면서 폼을 재고 싶고 그룹사운드라는 이름이 뭔가 멋지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음악에 심취하면서부터 학교 교사들의 체벌과[] 음악하는 것을 삐딱하게 생각하는 학교 내 시선 때문에 점점 학교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고 학업과 학교 생활에서 점점 멀어져가다 결국 몰래 담배 피우고, 땡땡이나 치는 학생이 되었다.[] 이 시절의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이 인터뷰에 나와 있다. 중3 때는 담임 선생님의 단체 기합에 반항하여 교실을 뛰쳐나갔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담임 선생님은 체벌을 없애셨으며 졸업할 때까지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이끌어 주셨다고 한다. 서태지가 인생에서 가장 고마웠던 선생님으로 기억하는 분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을 꼬드겨 5인조 스쿨 밴드 '하늘벽'을 결성하면서 최초의 밴드 사운드에 입문하게 된다. 그러나 결성 당시 제대로 된 악기를 가진 멤버는 악기를 산 본인뿐이라 나머지 멤버는 통기타, 피아노, 집에 있던 의자와 선풍기 날로 급조한 드럼을 악기로 사용했다고 한다. 멤버들의 연주 경력도 그 나이 꼬마들답게 리더이자 리드 기타를 맡은 안준범 씨가 친형에게 기타를 배운 것과 건반을 맡은 멤버가 피아노 학원을 다녔던 것이 전부였던, 소꿉장난에 가깝게 시작한 밴드였다.

다만 서태지가 베이시스트로 진로를 정하게 된 계기가 이 밴드였다는 점에서 이 치기 어린 밴드가 언급될 의의를 갖는다. 어린 서태지는 당시 통기타로 음을 짚어내는 것을 무척 좋아했는데 '음을 짚어내는 것이 베이스 연주자'라는 친구의 말에 베이스 연주자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작사, 작곡, 편곡, 베이스, 보컬을 서태지가 모두 전담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많은 시간이 흘러 서태지 15주년 기념관에 처음 공개된 '하늘벽' 사진에 따르면 활동 중 어느 시기엔가는 악기를 모두 구해서 그럴싸한 밴드 구성을 갖춘 듯. 하늘벽 데모 테이프에 들국화의 음악이 실려있던 것으로 봐서 들국화 카피 밴드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태지는 데뷔 당시 국내 밴드로 들국화를 좋아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으며 어린 시절 전인권을 좋아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학창시절 당시 인기 있던 머틀리 크루, 신데렐라, 본 조비 같은 메탈 밴드를 좋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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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머틀리 크루는 서태지가 최근까지도 언급하는 밴드이다. 네이버 뮤직에 서태지가 추천한 5장의 앨범 중 하나로 포함돼 있으며링크, 2019년에는 머틀리 크루의 뮤비를 보며 동경하던 바이크를 타기 위해 바이크 면허를 땄다고 밝히기도 했다.


2004년 이티피 페스트에서는 머틀리 크루의 드러머였던 타미 리를 초청하여 성덕이 됐다.

 

고등학교 자퇴

서울북공고 진학 후 스쿨밴드 하늘벽은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이때부터 서태지는 음악이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음악을 전문적으로 해보고 싶다고 결심하게 된다. 중학교 시절보다 늘어난 학업량[48] 때문에 도저히 학교를 다니면서 음악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서태지는 스스로 학교를 자퇴하기로 한다. 장장 2개월 동안의 설득 끝에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내면서 본격적으로 뮤지션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로써 서태지의 최종 학력은 군대도 못 가는 중졸이고 고등학교 중퇴다.[] 사족으로 꽤 그럴싸한 명문으로 출처가 없이 회자된 '서태지의 자퇴서'는 본인의 입으로 자신이 쓴 글이 아니라고 밝혔다

 

17세 저니맨

17세에 학교를 자퇴하고 활화산이라는 밴드에 잠깐 머물렀지만 멤버의 군 입대로 별 활약 없이 해체되어 버렸다. 이후 기타리스트 이중산의 소개로 락의 대부 신중현이 운영하던 클럽 '우드스탁'에서 연주할 기회를 잡게 되었으며, 우연히 이 모습을 본 신중현의 아들이자 시나위의 리더인 신대철의 눈에 띄어 픽업되면서 마침내 시나위 4집의 베이시스트로 참여하게 된다.

 

서태지 본인의 말대로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던 신대철에게 돈과 함께 픽업 제의를 받았지만 돈을 마다하고 함께 활동하게만 해달라고 말할 정도로 기뻐했고, 시나위의 멤버가 된 후 우드스톡에서 매일 하루 반나절을 함께 연주 연습만 하며 살면서 바로 4집 앨범 작업에 착수해 베이스와 드럼 편곡을 담당했다.[]

그러나 활동 기간 동안 신대철, 김종서, 서태지 3명의 음악적 견해 차이[]로 서서히 멤버 간의 팀워크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팀 해체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어느 제작자에게 공연 사기를 당했는데, 88체육관에서 예정된 공연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던 시나위 멤버들이 막상 공연장에 도착하니 공연 2시간 전까지 허름하게 무대 짜는 망치 소리가 들리는 등 말도 안 되는 무대가 서있었다고 한다. 크게 화가 난 신대철은 공연 주최 측과 거하게 싸운 뒤 술을 마시고 뛰쳐나가고, 미처 다 만들어지지도 않은 공연장에서 줄이 안 보일 정도로 기다리는 팬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던 김종서와 서태지는 결국 단 둘이 엉성한 공연장에서 안습의 공연을 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시나위는 해체되고 서태지는 실직하게 된다.[]

이후 김종서와 함께 '캔기획'에 찾아갔으나, 김종서만 영입되고 본인은 불발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도 계속 밴드를 알아보거나 직접 멤버를 모집해 밴드 결성을 시도하기도 했고, 한국에 비해 음악시장이 활성화되어 있는 일본에서 활동하기 위해 일본어를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시나위 시절부터 쭈욱 들어오던 랩 음악에 심취해, 새롭게 뭔가 획기적인 그룹을 한 번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하며 기행을 벌이기 시작한다. 전 매니저 최진열이 서태지 부모님에게 직접 들은 바로는 한때 어머니가 차려서 방에 넣어주는 밥만 먹으면서 6개월간 방 밖에 나오지 않고 랩 연습과 컴퓨터 음악 작곡 공부에만 몰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무궁화 밴드'라는 팀의 일원으로 무대에서 용돈을 벌었고[], '마이하우스'라는 클럽에서 일하다가 양현석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양현석과 팀을 꾸리기로 하고 제3의 멤버를 물색하며 이리저리 멤버를 갈아치워보다가 마지막으로 이주노를 선택하며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했다.

사족으로 서태지라는 이름은 자신이 좋아하는 한자인 '태' 자와 '지' 자로 이름을 짓고 여기에 가장 어울리는 성씨인 '서' 씨를 합해 '서태지'로 지었다고 한다. 2009년 서태지 본인이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출연해 이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는 여러 가지 설이 있었는데, 전 매니저 최진열의 증언으로는 서태후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고 공연장이라는 뜻의 영어 'STAGE'를 줄여 만들었다는 설도 있었다. 그중에서 일본의 록 밴드 엑스 재팬의 베이시스트였던 'TAIJI(타이지)'에서 따왔다는 설(서쪽의 TAIJI - 서TAIJI)이 주류였는데 시간이 흘러 서태지 본인이 별생각 없이 그냥 글자가 멋져서 지었다고 밝혔으나, 최근에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은 자서전에서 서태지는 타이지에서 따온 게 맞다고 주장했다. 타이지처럼 실력 좋은 베이시스트가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서쪽의 타이지를 줄여 서태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1995년에 공개된 공식적인 인터뷰를 보면 신대철의 주장과는 다름을 알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일본대중음악이 개방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신대철의 주장이 신빙성이 있다고 보지만, 이름에 관한 주장은 이름을 지은 본인의 주장이 공식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서태지와 아이들

사진 설명 : 메탈밴드 장발 베이시스트에서 소년계 댄스 가수로 변신한 모습.[]

결성 후 방송, 라디오 등 각종 매체 활동을 하다가 92년도 MBC 쇼 프로그램 <특종 TV연예>에 출연하며 전국의 청소년층에게 폭발적인 충격을 안겼다.[]

작곡·작사가들이 신인 가수들을 평가하는 짧은 코너에 출연해 난 알아요를 불렀는데[] 그 당시 심사위원들의 평가는 이러했다. 박한 평가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결국 평균 7.8점으로 신인무대 첫 회 출연자이자 최저점 득점자라는 불명예를 기록했는데 이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출연한 신인가수 중에 평균 8점 이하의 가수는 한 팀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평가는 위에 언급된 심사위원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랩 음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던 시절이었기에 당시 매니저를 맡고 있던 최진열의 증언으로는 방송국에 홍보용으로 CD를 줘도 들어보고는 "그런 판데기는 이태원 클럽에나 걸어라"라며 집어던지기도 했고, 주변 선배 매니저들도 망할 것이 뻔하다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비록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았지만, <특종 TV연예> 출연을 계기로 당시 세계 음악 트렌드와 한참 격리된 트롯트, 발라드 위주의 대중가요에 염증을 느끼던 당시 청소년, 대학생 층에게 이 곡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난 알아요를 필두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큰 폭풍이 시작되었다. 유튜브 관련 영상 댓글에 적힌 저 방송을 직접 봤다는 사람들이 증언을 보면 "주말이 끝나고 학교를 가니 서태지 이야기밖에 없었다", "다음날 학교 앞에 복사테입장사가 판을 깔았는데 금방 동이 났다", "방송 이후 최고가 되는데 단 하루가 걸렸음" 등으로 당시의 해일같은 반응을 알게 해준다. 그 뒤로 시대의 변화를 자각한 <특종 TV연예>는 신인에 대해서 관대한 평가를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서태지와 아이들은 <특종 TV연예> 최저점 득점자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솔로

은퇴 기자회견을 마친 서태지와 아이들은 미리 마련된 헬기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해 출국 절차를 밟았다. 경유지인 괌에서 세 멤버는 뿔뿔이 흩어졌으며, 이후 서태지는 미국으로 갔다는 이야기만 나돌 뿐 문자 그대로 세상에서 증발해버렸으며, '미국 유학설', '결혼설', '컴백설' 등이 나돌았고, 신문과 잡지도 이를 적극적으로 보도했다. 심지어 역술가 오재학이 낸 예언서 <국운>에서 서태지가 1997년 컴백한다고 예언까지 했는데, 이마저도 틀렸다.

1998년 7월 7일 갑작스레 5집을 발표하였다. 당시 세계적 추세인 얼터너티브 록을 기반으로 한 원맨밴드 앨범인데, 5집 앨범 발매 후 기자회견은 언론 기자들과의 이메일 문답으로만 기자회견 인터뷰를 대신하고 일체 얼굴조차 비추지 않고 5집 노래 외의 미네뜨 CF에서 목소리만 들려주었을 뿐 국내에서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다가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귀국하게 된다

 

비밀 결혼과 이혼

1996년 11월 20일, 일간지 <스포츠서울>은 '은퇴한 서태지가 미국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면서 1996년 12월 24일 재미동포 여대생 김모 양[]과 결혼할 예정'이라는 특종기사를 냈으나 서태지 측이 적극 부인하고 명예훼손 소송 등 강경 대응 방침을 밝히면서 세간의 흔한 오보인 것처럼 흐지부지되었다.

그러나 그런 강경 대응이 무색하게 기사에 딱 들어맞는 상대와 1997년 전격 비밀 결혼을 한다. 이후 1998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결혼설의 사실 여부를 묻자 "낭설이다" 라며 거짓말로 딱 잡아뗀다. 기사 원문 이를 두고 부인(이지아)과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란 의견도 있고, 어차피 결혼 사실을 밝혔어도 생활적으로는 바뀔 게 없었기 때문에[] 팬들을 기만한 비겁한 변명일 뿐이란 의견도 있다.

다만, 처음부터 아니다라고 강경하게 나오면, 언론이 사생활 관련 질문을 꺼내는 것을 어느 정도는 차단하는 효과는 기대할 수 있다.


실제로, 위에 언급된 동아일보 인터뷰 내용의 대부분은 음악에 대한 것이어서 사생활에 관한 질문은 독자들의 뇌리에 남지 않았고, 자연스레 대중들의 관심은 음반의 완성도에 대한 논란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만약 이때 결혼 사실을 밝혔다면, 인터뷰의 내용은 주객이 전도되어 모든 매스컴에 부인에 대한 추측과 뜬소문이 도배되었을 것이다.[]

2000년 6집으로 다시 얼굴을 드러낸 기자회견 당시에도 결혼 계획에 대한 질문에 본인이 "여자 친구가 없다"고 말해 미혼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때에는 이미 2년 반 정도의 짧은 결혼 생활 끝에 별거에 들어간, 사실상 이혼을 앞둔 상태였다. 따라서 여자친구가 없다는 말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훗날 상당수의 팬들이 이 당시의 발언에 대해서 서태지가 자신들을 기만했다고 여기고 등을 돌리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또한 "앞으로 결혼할 계획이 없다, 서류에 도장 찍는 관계가 싫으며, 만약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냥 동거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당시 파경에 이른 상황을 반영한 발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당시 재혼할 생각이 없었다면 이 또한 틀린 말은 아니다.

 

훗날 2008년에 방영된 서태지 컴백 특집 프로그램 '북공고 1학년 1반 25번 서태지'에서는 (여자 친구가)설령 있더라도 밝힐 수 없다고 에둘러 표현했다.

2011년 4월 21일 <스포츠서울>의 보도에 의해 서태지가 최근 인기배우 정우성과 열애중인 이지아와 이혼했으며, 이미 그녀가 제청한 위자료 및 재산분할 소송이 진행 중인 것이 밝혀졌고 연예가 전반에 핵폭탄급 파동을 일으켰다.[] 서태지의 이야기라는 특성상 정보가 극도로 제한된 만큼 수를 세거나 일일이 언급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양의 루머가 트럭 단위로 대한민국 인터넷을 휩쓸고 다녔다.당시 '감금설'에 대한 반박 이후 서태지는 본인이 설립한 소속사를 통해 이혼 사건에 관련된 일반 대중에의 아래와 같은 해명 자료를 발표했다. 해명 자료가 실린 기사는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이 소송은 이지아가 소취하를 신청하고 서태지가 취하에 부동의하여[] 계속되었다가 결국 쌍방이 합의함으로써 마무리 되었다. 소송에 대한 개략적인 과정은 이 글에 정리되어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읽고 참고해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2년이 약간 지난 2013년 5월 15일 배우 이은성과 결혼한다는 발표가 언론을 탔는데,# 다음 해인 2014년 8월 11일 이지아가 SBS 힐링캠프에 전격 출연하며 지난 결혼생활에 대해 서태지를 언급하며 디스를 날렸다. 그런데 이혼합의서에 따르면 지나간 결혼 생활에 대한 상호 공개적 비방 등이 있을 경우 일일이 위자료를 지급해야 하기 때문에 서태지가 소송 취하에 동의해 주지 않을 정도로 강경하게 나가려 했음을 되짚어보면 이지아의 발언 수위가 상당히 위험한 상황. 방송 직후 디스패치에서는 발 빠르게 관련 기사를 내보냈는데, 오히려 이지아에게 불리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기사 사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뒷조사는 디스패치를 설립한 기자들이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직후부터 끈질리게 매달려 온 일이었기에 적어도 이 부분에 관해서는 디스패치의 정보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후 서태지가 대중의 온갖 비난으로 점철된 십자포화를 감내하고 KBS 해피투게더에 출연해 이지아에게도, 일반 대중에게도, 팬에게도 모두 미안하다고 공개적으로 사과하면서 사실상 장장 14년에 걸친 이슈 종결.

 

은둔하던 슈퍼스타

결론부터 말하면 활동이 뜸하고 주변인들도 서태지의 얼굴을 보기 힘든 것은 사실이나, 이것이 '신비주의'로 이어지는 지에 대해서는 과장이 많이 섞여있다.

요약하면 8집까지의 서태지는 연예인들의 연예인이었다. 사실, 1990년대~2000년대를 비롯해서 현재까지 활동했던 가수들을 포함한 연예인들은 실제로 서태지와 아이들 팬 출신이 정말 많다.#

활동기에는 이런저런 소식이 나오지만, 비활동기가 되면 공적인 일과 개인사를 구분하는 웬만한 해외 아티스트도 비교 대상이 되기 어려울 만큼, 철저하게 세상에서 증발해왔다. 얼굴 보기 어렵기로 이야기가 나오면 단연 첫 손가락에 꼽히던 인물.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부터 은퇴 직전까지는 국내에 살아서 그나마 조금씩 정보가 있었으나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이후로 8집까지는 지구에 살고 있기는 한 건지, 진짜 살아 있기는 한 건지도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본인이 운영하는 공식 홈페이지 '서태지닷컴'에 가뭄에 콩 나듯 한 번씩 본인의 여행 사진이나 RC카 등의 사물을 찍은 사진을 업로드하며 근황을 전하는 것이 팬덤에 전하는 유일한 생존 신고나 다름 없었다.

심지어 과거 서태지컴퍼니 소속이었던 밴드 넬도 서태지와의 관계를 "친하기는 한데 얼굴보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힘들 정도의 관계"라고 표현했다. 그래도 양현석과 이주노의 말을 들어보면 아이들 시절 당시 레코딩 작업에 들어갈 때도 지금이랑 별 다를 바 없이 잠수하면 대책이 없었다고 하니 서태지의 타고난 성격인 듯. 실제 양현석이 앨범 녹음을 마치고 서태지만 마무리 작업을 위해 미국에 남아있고, 자기는 한국에 왔는데 몇 달이 지나고 서태지 사망설이 나오자 실제 죽은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그래도 다행히 재혼과 9집 활동을 기점으로 국내에 완전히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간 본인조차 의도하지 않아왔고 수시로 부정했던 '신비주의'의 오명을 이제나마 벗어던질 수 있을지가 주목된다. 김종서도 2014년 서태지와 함께 출연한 해피투게더에서 "아버지가 되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장 해제가 되었다"고 밝혔다.

그런데 사실 아티스트나 예술가들 중에는, 외부 환경으로 인해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일부러 자기만의 작업 공간을 만들어 활동하는 사람들도 꽤 된다. 특히 서태지와 같은 원맨 밴드 레코딩을 지향하는 뮤지션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 즉, 다시 말해서 팬들의 오버 및 안티들의 루머로 서태지 혼자서만 신비주의니 뭐니 하는 이미지가 생긴 것뿐이지, 서태지의 성격은 이런 아티스트들의 여러 스타일 중 하나로 봐도 그냥 무방하다.

후에 매 앨범 발매 때마다 인터뷰에서 "자신의 신비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받는 곤혹을 치르는데, 그에 대해 서태지는 매번 "신비주의라는 것은 마법, 주술 등의 이미지와 같이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을 뜻하며, 일과 사생활을 조금 엄격하게 구분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과는 다르다."라는 답변을 했다.

예를 들어 자타공인 신비주의 뮤지션인 Sopor Aeternus와 같은 경우엔 서태지와는 달리 생년월일은 물론 본명까지 숨기고 다닌다. 평소 자신의 취미 생활까지 만천하에 공개한 서태지가 과연 신비주의의 발끝에라도 다다를지 의문이다. 거기다가 연예인/유명인에 대한 사생활 존중에 시끄러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유독 자신의 사생활 공개에 대한 권리를 지킬 대로 지키고 있는 서태지가 신비주의로 오해 받은 것 또한 아이러니하다.

심지어는 한국에만 해도 더 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TV 출연 횟수를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으며, 또 TV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활동 자체를 거의 안 한다.[] 오죽하면 집 앞 커피숍에서 더 보기 쉽다고 하겠는가. 가끔 TV에 나온다해도 노래 요청에서는 '콘서트 가서 들으라'는 식으로 대응하니 그래도 새 앨범 발매하면 TV에 몇 번 출연해 노래도 부르고 자신의 단독 콘서트를 제때 못 온 팬들을 위해 지상파에 종종 송출까지 해주는 서태지는 이에 비하면 굉장히 개방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서태지가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공개를 꺼린 것 또한 새 앨범이 발매될 때마다 각 앨범에 대한 이미지 컨셉을 자신의 타이밍에 맞춰서 알아서 공개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이게 또 신비주의라고 언론에 뭇매를 맞은 셈이다.

엄밀히 말해 서태지는 자신의 권리를 지킨 것이고, 물론 팬들과의 커뮤니티를 위해 공개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의 타이밍에 맞춰 공개한 셈이니 자신을 완벽하게 숨긴 적은 없다. 한마디로 서태지 본인이 공개하기 싫어서 또는 공개할 타이밍이 아니라서 안 한 건데[] 그걸 못 참고 난리친 언론이 문제다. 연예인이 모든 걸 다 드러내야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당연히 서태지만 이런 것도 아니다. 일본의 뮤지션 GACKT 역시 한 TV 방송에서 자택공개를 했는데, 유독 녹음실만 공개 거부를 하였다. 때마침 신곡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스포일러 방지 차원에서 작업실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는 것. 방송 스탭이 이 경고를 어기고 몰래 촬영하려다가 각트에게 들키자 각트는 그 자리에서 스탭에게 화를 내며 방송 스탭들을 전원 내쫓아버렸다.[]

몇몇 지인들이 예능에서 서태지와의 친분 관계를 알리기도 하지만 다소 과장된 발언인 측면이 짙어, 활동하면서 마주치는 것을 넘어 실제 인간적 친분이라기엔 신빙성은 없는 듯.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에도 다른 멤버들과 거의 개인적으로 어울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고 하며, 친구 1명을 만나기 위해 매니저에게 부탁한 것을 제외하고는 활동 내내 아무도 사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람을 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국민MC도 서태지와 말까지 놓는 사이지만 왠지 아직은 그렇게 친하지 않아보인다.

그나마 가장 친한 관계로 알려진 사람이 이종 육촌 지간인 신해철[]과 시나위 시절 친분을 맺은 가수 김종서인데 이 둘은 2006년 겨울쯤에 같이 스키 여행을 다녀온 것이 알려질 정도로 친한 사이라고 한다.

김종서의 경우는 서태지가 시나위에 있었을 때 인연을 맺었다고 하며, 해피투게더에 출연했을 때 당시 록 밴드들이 마약에 탐닉하는 등 비뚤어진 길로 쉽게 틀어지던 때였는데 자신이 그런 잘못된 길로 안 갈 수 있었던 건 김종서의 가르침 덕분이었다고 회고했다. 또 서태지의 취미 중 하나인 캠핑카 여행을 둘이서 자주 떠났다고도 하며 서태지와 아내 이은성과 함께 스키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고.

2014년 9월 15일 디스패치가 김종서, 박신혜와 빵집에 있는 서태지의 사진을 공개하는 등 김종서와는 꾸준히 교류 중인 듯 하다. (박신혜는 아내 이은성의 절친이라고 한다.)[] 9집 공개 전 해피투게더에 출연해 서로가 발언한 멘션을 보면 자주 만나 음악 얘기 외적인 시시콜콜한 수다를 떠는 등 아주 친밀한 교류가 있는 듯.

2014년 9월에는 라디오 스타에 신해철이 출연, 서태지와 비슷한 시기에 음반을 내놓으며 누가 흥하냐 내기를 걸었다는 발언 중 서태지를 '몇 달에 한 번씩은 꾸준히 본다'고 언급해 친척 관계는 원만한 듯.

또한 유희열의 스케치북 녹화에서 밝히기로는 며칠 전에 이승환, 윤상과 함께 이자까야에서 만나기도 했다고 밝혔다. 방송에선 편집되었다.

한때 서태지의 상업주의 루머와 더불어 음악 스타일이 바뀌는 부분에 대해서도 안티들이 다른 아티스트와 서태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루머를 퍼뜨리곤 하는데, 대부분이 믿을 것 없는 헛소리들이다.

대표적으로 서태지와 크래시의 안흥찬이 중간에 서태지의 행보로 인해 서로 간의 사이가 나빠졌다느니 하는 루머가 생기기도 했는데, 정작 본인들은 "좋은 뮤지션으로서 좋게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서태지)"라거나 "쿨한 관계(안흥찬)"라고 하며 서태지의 컴백 공연에 안흥찬이 다시 게스트 뮤지션으로 나오는 등 루머를 일축시키기도 했다.

후에는 이 루머의 바톤을 NELL이 그대로 받았는데, 서로 간의 아티스트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이런 루머들을 섣불리 믿지는 말자. 멀쩡히 서로 잘 지내는 당사자들 가지고 이상한 루머 만들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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