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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와 아이들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2. 8. 1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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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를 넘어 한국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아이콘.

1991년 9월에 결성된 3인조 음악 그룹으로, 1990년대 초반 대한민국 가요계에 혁명과 같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오고 큰 지각변동을 일으킨 팀이라 평가받는다. 대한민국 가요계 내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영미권 대중음악계의 비틀즈나 너바나 혹은 마이클 잭슨에 못지않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보컬, 작사, 작곡 및 연주, 프로듀서 등 음악 전반을 책임진 서태지를 네임리더[]로 둔 그룹. 서브보컬과 안무를 맡은 양현석, 이주노와 함께 1991년에 결성한 3인조 댄스 그룹이다. '서태지'라는 이름도 촌스럽고,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팀명도 병맛이라고 하던[]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이러한 논란을 데뷔 앨범부터 갖춰진 탄탄한 실력으로 잠재웠다.

1992년에 1집 난 알아요로 데뷔했으며, 1996년에 은퇴&해체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해체 이후에는 각자의 음악활동들에 전념하였다.

 

서태지와 아이들 신드롬의 시작인 1992년 4월 11일(토) MBC 특종 TV연예 방송이다. 특이한 것은 아침마당 진행자로 유명한 이상벽이 연예부 기자 직함을 달고 나온다는 것이다. 이상벽은 나훈아, 김지미의 결혼 특종도 냈던 연예부 기자 출신이자 연예 평론가로서 책도 냈었다. 그의 이미지를 바꾼 아침마당은 이 방송과 거의 비슷한 시기 (1주일도 차이 안 난다) 에 시작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이 방송으로 데뷔를 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데뷔하고 한 달쯤 지난 시점에서 방송한 것이다. 이 방송이 나오기 이전에도 여러 매체에 출연해서 노래도 했었다고 당시 매니저였던 최진열이 증언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2년 3월 14일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291회에서 첫 데뷔 무대를 가졌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 무대

여담으로, 멤버들 모두 올바른 병역과는 거리가 멀다. 서태지는 성격장애와 위천공으로 병역면제됐으며, 이주노도 생계곤란으로 면제, 그나마 양현석이 현역으로 입대했지만, 그도 입대한지 8개월만에 의병 제대했다. 이 당시에는 청년층 인구비율이 높다보니 벌 시덥지않는 이유로 병역면제가 되거나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방위로 전출된 경우가 많았는데 사실 이런 어이없는 사례에 비하면 빽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으니 그나마 말은 되는 사례였다. 또한 전원이 대학에 안 갔는데, 대학진학률이 30% 안팍이던 시절인지라 대학안간것이 더 평범한 시대였지만[]서태지와 이주노는 중졸[]이었고, 양현석은 그래도 당시 평균인 고졸로 학력을 마쳤다.

 

서태지와 아이들 결성

시나위의 베이시스트였던 서태지는 시나위가 해체된 이후, 정통 락 뮤지션으로서는 드물게, 80년대부터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생소하던 랩 음악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랩 장르를 바탕으로 한 획기적인 댄스 그룹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마이하우스라는 나이트클럽 업소에서 활동하는 무궁화 밴드의 멤버로 있을 때 같은 업소에서 일하면서 댄스 그룹 활동에 도움이 되고자 춤을 배우기 위해서 소개받은 양현석에게 자신이 작곡하고 있던 음악들을 들려주게 된다. 1년간의 군 생활 뒤 의병제대한 양현석은 서태지가 들려주었던 음악들을 잊지 못해 제대 후 다시 서태지를 찾아오고 때마침 댄서들을 구하고 있었던 서태지와 합이 맞은 둘은 듀엣을 결성하기로 하고 녹음까지 완료했으나, 추가 멤버를 들이기로 하고 수많은 이태원동 댄서들을 둘러보다가, 박남정과 프렌즈로 활동했었던 이주노를 최종 멤버로 영입하면서 3인조 댄스 그룹이 되었다.

여담으로 이주노가 나중에 합류하는 바람에, 서태지와 아이들 1집에는 이주노의 목소리가 없다. 이 사실을 양현석이 20년 만에 자기 입으로 직접 말했다. 이 때문에 이 항목 상단부에 있는 영상에서 보듯 방송에서 사용한 '난 알아요' 음원은 앨범 음원이 아니라 이주노의 목소리까지 덧입힌 버전이며, '환상속의 그대'는 아예 여러 버전의 믹스를 새로 발매하여 활동했다. 사실 양현석은 이주노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형이었기 때문에, 팀내 불화가 생길까 염려되어 받아들일까말까 망설였으나 그래도 같은 댄서 출신인데 통하는데가 있으리라 판단하고 이주노를 팀에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아이돌 그룹이 아닌 어떤 단체라 할지라도 굉장히 희귀한 사례인 막내가 리더인 그룹이었다 나이가 제일 어린 서태지가 팀을 통솔한 것이다. 그 다음 서열은 나이가 두번째로 어렸던 양현석이었다. 이렇게 그룹명과 실제 멤버간의 나이 서열이 어긋나다보니 팬들 중에선 그들을 우스갯소리로 '서태지와 어른들(...)'이라고 부른 팬들도 간혹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그룹 이름은 리더인 서태지가 지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양현석은 힐링캠프에 출연해, 원래 이름은 "태지보이스(TAIJIBOYS)"였는데[18] 매니저에 의해 멋대로 "서태지와 아이들"로 바뀌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앨범 부클릿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표현은 1집에서만 등장하고 2, 3, 4집에서는 'Seotaiji and Boys'라는 영어식 표기가 대신 등장한다.

아무튼 서태지가 중심에 놓인 그룹 이름과 막내가 리더라는 점에서 드러나듯이 서태지 개인의 비중이 컸던 그룹으로, 장르나 스타일은 다르지만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과 비슷할 정도로 리더로써 서태지의 영향력이 강력했다. 이는 서태지가 단순한 작곡자 차원을 넘어 안무 구성을 제외한[19] 음악, 컨셉, 제작 활동의 대부분을 서태지 본인이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피투게더에서 서태지가 밝힌 바에 따르면 수입 역시 3:3:4로 본인이 4를 가졌고, 음반은 본인이 제일 많이 관여를 했기에 2:2:6으로 6을 가져갔다고 밝혔다. 예외적으로 1집의 '이 밤이 깊어가지만'과 3집의 '널 지우려 해'는 양현석이 작사를 했으며, 락밴드로 변신한 이후에 4집에 'Come Back Home'과 같은 힙합곡이 수록된 것도 양현석의 제안이었다고 한다. 양현석과 이주노는 1, 2, 3, 4집 의 대부분의 안무를 만들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신드롬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이후, 한국의 대중가요계는 성인가요와 발라드 위주에서 10대 취향의 댄스음악 위주로 재편되었으며, 단순히 트렌드의 변화와 차원을 달리하여, 영미 팝이 한국 음악, 특히 젊은이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끼지던 시절에 이들은 영미 팝 가수들이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가지고 있던 영향력, 특히 "10~20대의 지분"을 송두리채 떼어 한국 가요로 가져오는, 혁명적인 역할의 선봉이 된다.

또한, 현진영과 같이 한국어는 구조상 랩이 불가능하다.라는 당시 전문가들의 선입견을 무너뜨리고, 댄스와 랩을 대중화시켰다. 2집 하여가에서 최초로 국악과 흑인음악(힙합), 헤비메탈을 접목하고, 3집에서는 랩 메탈, 4집에서는 갱스터 랩 등의 앨범을 들고 나올 때마다 새로운 장르를 도입, 소개하면서 대한민국 대중가요계에 신선한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하기 직전 상황의 가요 톱텐에서는 태진아가 <거울도 안 보는 여자>로 1위를 하고 있었다. 물론 한국에서 보기 드문 다양한 음악색을 보여주던 조용필, 김연자 등의 성인 가요 네임드들이나 신승훈, 변진섭과 같은 세련된 발라드 가수들, 김수철, 신해철, 현진영 등 해외 뉴웨이브를 받아들이던 음악인들도 음악산업 저변에서나마 힘을 썼으나, 이들의 대부분은 대중매체라 할 수 있는 TV보다 전문적 영역에서의 공연을 더 많이 했기에 당시 TV의 뒤쳐진 문화는 당시 10대·20대가 따라가고 싶던 힙합, 현대적인 댄스팝뮤직을 비롯한 "세계적인 트렌드"와의 괴리가 있었던 것이다. 80년대를 지나 민주화가 된 90년대가 되었지만 이미 사회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기지개를 켠 상황에서 새로운 유행을 따라가고 싶은 구매력까지 갖춘 10~20대들은 있는데, 만족시킬 만한 한국어 콘텐츠가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랩뮤직이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된 1990, 91년 바로 이듬해인 1992년도에 '한국어 랩'과 '회오리춤'을 들고 서태지가 나타났다.[] 10대, 20대들이 원하던 세계적인 트렌드와 한국 음악 사이의 간격이 기적과 같이 좁아지고 억눌려져 있던 젊은층의 수요가 한꺼번에 폭발하였던 것이다. 단순히 랩 음악을 한국에 반짝 유행시킨 정도가 아니라, 이로 인해 대한민국 가요계의 판도를 현대식 댄스뮤직과 랩뮤직으로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이 글을 읽고 감이 잘 오지 않는 1990년대생 이후의 위키러들을 위해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 보자.

그 당시 문화적인 충격을 1990년대생 이후 세대들이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이러한데, 라디오는 7개[]에 TV 채널은 지상파 5개[]뿐이고, 인터넷[]과 케이블 방송도 없었으며 PC통신은 우선 PC 자체가 당시 단가가 지나치게 높아서 일반 가정이 구하기 매우 힘들었고 있어봤자 비싼 전화세가 문제였다. 신문 구독률이 여전히 70%대에 이를 정도로, 지면을 통한 정보 수집이 주류일 시절이었다. 민주화가 정착되었다고 하지만 사회 분위기 때문에 TV에서는 머리를 기르거나 염색한 남자도 못 나온다.[] 한국 영화는 흔히 말해 "내돈 주고 보기 아깝다."라는 수준이고[], 방송에는 트로트, 발라드, 템포만 빠른 정도의 댄스 가수 위주였다. 그런데 해외 팝 뮤직을 보면 한국과는 전혀 다르다. 형형색색 다양한 패션을 갖춘 형, 누나들이 훨씬 더 감각적이고 파격적인 음악을 하고 있고,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멋진 춤을 추고, 신선한 장르의 강렬한 노래를 부른다. 발라드도 좋지만, 해외의 가수들처럼 젊은 사람들 구미에 맞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

다행히, 경제 수준이 좋아지면서 마이마이와 같은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나 라디오 겸용 플레이어는 제법 보급이 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예전보다 음악을 접할 통로는 많아졌다. 90년대 이후 출생자에게 이해하기 쉽도록 비유를 하자면, 물가대비 당시 카세트 플레이어는 지금의 닌텐도 스위치 가격 정도였고, 정품 카세트 테이프 앨범은 지금 물가 기준 대략 2만원 정도 수준이었으며, 레코더를 이용한 불법복제 테이프는 대략 5~7천원 정도 수준이었다. 정말 집안 형편이 어렵다면 이정도 비용도 학생들에게는 버겁겠지만, 그렇다고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지 못할 정도는 아닐 정도로 플레이어 보급이 많이 이뤄질 시절이었다. 또한 휴대용 플레이어를 구할 정도 수준은 되지 않는 집에도 TV나 라디오는 이제 가정당 적어도 1대는 살 수 있을 정도로 가격이 많이 내려갔기 때문에 당시 학생들은 TV나 라디오를 통해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는 휴대폰 및 삐삐가 부유층이나 직장인들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늦은 저녁이 되면 친구와 집 눈치를 봐가며 집전화로 잠깐 대화를 하는게 전부였고, 저녁에는 가족끼리 둘러앉아 TV를 보고, 밤에는 별이 빛나는 밤에와 같은 라디오 방송을 듣는 정도가 문화생활의 전부였다.

그렇지만 TV를 틀면 어제 뮤직뱅크에서는 여전히 송가인이 수십 년째 지겹게 들어온 트로트로 5관왕을 했고 역시나 임영웅이 트로트 메들리로 지상파 방송사 가요 차트를 쓸고 있는 상황이다. 또 발라드 가수들이 신스음 하나 없는 브라스 밴드에 맞추어 부르고 있다. 그런데 오늘도 송가인이 이겼나 임영웅이 이겼나 보려고 TV를 틀었더니 난데 없이 오늘 방탄소년단(이하 BTS)이라는 신인 그룹이 '피 땀 눈물'이란 랩과 강렬한 비트를 토대로 군무가 잘 짜여진 노래를 들고 나왔단다. 심지어 19세밖에 안 되었다는 멤버 RM의 자작곡이란다. 바로 어제까지 텔레비전을 틀면 트로트와 발라드 말고는 다른 음악은 듣기가 힘들었는데, 평생 그런 것을 보지 못했고 외국의 것을 갈망만 했던 10대, 20대가 듣고 보는 충격은 어느 정도였을까?

다음날 학교에서 아이들이 BTS 이야기만 하고 있지 않을까? 상술한 것처럼 완전히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방송에서 봤다고 생각해보자.
1980년대 들어 영미의 팝음악은 다양한 장르의 탄생과 마이클 잭슨 등 대스타의 등장에 힘입어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국내에서도 이들 영미권 팝스타의 인지도는 특히 10~20대에게 대단해서 동네 레코드샵에서 빌보드 HOT 100 복사판을 나눠줄 정도였고 유로댄스 생소한 가수의 내한공연에도 만석을 이룰 정도였다. 인터파크 같은 온라인 예매도 없었으니, 시내 대형서점까지 한나절을 잡고 직접 버스타고 가서 티켓을 사오거나, 은행을 통해 입금예매하는 게 전부였던 시절에도 그정도 열의로 공연을 찾아다니는 음악 팬들이 증가하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국내 음악시장은 과거 군사정권 시절부터 공윤의 검열 등의 영향으로 새로운 장르의 탄생보다는 정부가 지원하는 건전가요나 기성세대풍의 기존 음악 위주로 형성되었다.

즉, 세계의 유행을 좇아 새로운 장르를 받아들일 토양과 수요는 이미 1980년대 초중반부터 무르익었고, 경제적으로 구매력을 갖춘 10대들·20대들이 생겨났으나 한국 음악계가 거기에 맞춰주지 못한 것. 80년대, 90년대 초의 wham, Duran Duran, A-Ha, 바비 브라운 등등. 특히 그 당시의 10대 청소년들에게 뉴 키즈 온 더 블록(이하 NKOB)의 인기와 파괴력은 엄청났다. 서태지 데뷔 바로 한 달 전의 NKOB 내한 당시 수십명이 부상당하고 깔려죽는 사망자가 발생하는 참사가 벌어져서 공연이 중단될 정도였다.[]

오죽하면 10~20대 취향 컨텐츠 부족은 당시 합법적으로 수입이 금지되어 일반인들은 접하기 힘든 J-POP까지 손을 뻗히면서 쿠와타 케이스케 등 당대 일본의 유명 음악 또한 1980년대 후반 암암리에 청소년들 사이에 유행했다. 참고로 그 시절은 반일감정이 지금보다 더 컸을 때이며 인터넷 같은 정보 매체가 부족했을 때였다.

말이 안 통하는 외국인이 아닌 한국 사람이 한국말로, 10대·20대 취향에 맞는 그러면서도 서양 사람들의 전유물로만 생각되었던 랩 등이 들어간 세련되고 독특한 음악과 춤을 선보였던 그 신선함과 파괴력은 엄청났다. NKOB나 듀란듀란같은 영미권 팝 아이돌이 가지고 있던 지분을 통째로 떼내어 한국인이 가져온 기념비적인 사건인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이전에는 아예 없었던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이전에도 댄스 곡을 했던 가수들이 꽤 있었다. 나미, 민해경, 소방차, 박남정, 김완선 등은 아이돌의 효시라 볼 수도 있고 빠른 댄스 음악을 하고 있었다. 이들도 분명히 의미가 있고 진보가 있는 노래를 발표했고 무대를 보여줬다. 그리고 흑인 음악을 기반으로 데뷔했고 절정의 기량을 가진 현진영도 있었다.

# 한 블로거의 서태지에 관한 포스팅인데, 그는 서태지를 가장 위대한 한국 가수로 꼽고 있다. 서태지 이전과 이후는 하나의 단층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라디오에서 처음으로 난 알아요를 들었을 때는 평범했지만, 화면에서 봤을 때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것은 무슨무슨 장르를 도입했다는 말로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충격이 별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흑인음악이나 댄스음악을 도입했던 것은 사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아니고 먼저 하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은 파괴력이 달랐다.

가장 좋은 예시가 한국형 흑인음악을 시도한 현진영이다. 당시 흑인음악에 관한 탁월한 이해도, 서태지 이상 가는 가창력, 그리고 한국 역대 최고의 댄서로 꼽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을 만큼 비교도 되지 않는 춤 실력을 가졌으며 서태지보다 상당히 먼저 데뷔하기까지 했다. 현진영과 와와 시절 그는 최고의 댄서인 구준엽과 강원래를 양옆에 거느리고 뛰어난 테크닉과 절정의 운동능력을 과시했다. 그리고 서태지의 장점이라고 흔히 말하는 흑인음악 도입도 그가 먼저 했다. 꽤 잘생기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흔히 말하는 서태지의 성공조건과 같다. 그럼에도 그는 서태지와 비슷한 급의 파급력은커녕 1류 인기가수라고 하기에도 어려웠고 약간 이름을 알린 정도였다.

그가 절정의 인기를 끌게 된 것은 흐린 기억 속의 그대, 현진영 go 진영 go 등을 통해 서태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무대를 보여주면서였다. 완성형 가수로 데뷔한 현진영의 가창력과 춤 실력은 짧은 시기 사이에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서태지 이후의 현진영 무대 구성이었다. 서태지 이전 현진영의 야한 여자, 슬픈 마네킹 등의 무대와 서태지 이후의 현진영이 보여주는 무대를 보면 결코 동일한 가수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차이가 있다. 나미와 붐붐도 인디언 인형처럼이 큰 인기를 끌었고 흑인음악 도입, 댄스, 붐붐의 랩, 쟈넷 잭슨의 영향을 받은 의상까지 꽤 인상적이지만 가요계의 조류를 바꾸고 그러지는 않았다는 것에서는 서태지 이전의 현진영과 와와와 비슷하다. 이쪽도 글로 늘어놓는 조건으로 따지면 서태지와 아이들과 별 차이가 없지만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서태지의 업적으로 말해지는 랩 역시 1990년에 인기가수였던 신해철이 방송무대에서 영어랩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특이함 때문에 한국 가요의 계보에서 잘 말해지지 않지만, 201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재조명되는 소위 탑골 GD 양준일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흑인음악을 하고 춤도 추는 양준일조차도 서태지 이전과 이후의 무대는 전혀 다르다. 시대를 엄청나게 앞섰다며 양준일에 대한 칭찬이 쏟아지는 무대들은 죄다 서태지 이후의 무대다.

흔히 서태지와 아이들의 성공조건이라고 불리는 여러 조건들이 있다. 그렇지만 서태지 이전에도 그것을 갖추고 있던 다른 가수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요계를 재편한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이었고, 그들이 등장한 이후에는 블로거의 표현대로 단층이라고 할 정도의 차이가 생겼고, 한국 가요계는 서태지가 분출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세례를 맞았기 때문에 더는 단순해질 수 없었다.[]

이것은 그들이 무대에서 보여준 모든 모습, 그리고 무대 바깥에서 보여준 모습들이 기존 가수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단순히 적시에 적절한 음악 장르를 한국에 도입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젊은 가수는 자기 색깔이 확고한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단층 아래에서 도태되었고, 자기 색깔을 지닌 가수들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렇게 서태지와 아이들의 형식으로 재편된 모습이 현재의 K-POP이다.

 

방송국과 가수의 관계를 재정립하다

기획사 사장과 방송사 PD가 황제로서 군림하였던 20세기 시점에서, 온전히 서태지와 아이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음악을 만들고 춤을 개발하여 유행시켰으며, 1집 이후는 자신들만의 힘으로 스스로 소속사를 만들어 활동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방송 언론, 또는 음반업계의 관행, 지금보다 수배는 엄격했던 검열기준, 기득권에 저항한 행보는 단순히 겉으로만 젊고 반항적인 이미지가 아닌 세상을 바꿀 능력과 자신감을 가지고 낡고 곪아버린 기득권의 시스템을 몸소 깨부순 새시대의 상징 같은 역할을 해낸 것이다. 이는 K-POP이 아시아에 큰 영향력을 가지는 2010년 이후 지금의 시점에서도 어떤 가수도 달성하기 힘든 업적이다.

이는 결코 다른 가수들을 폄하하는 의미가 아니라 이런 활동 방식이 어느 시대에 비춰 봐도 지극히 예외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가수들도 나름 높이 평가받을 부분이 있으나, 가수가 시스템에 맞서 주도적으로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서태지가 끼친 파급력이 넘사벽급이었던 것.

지금도 방송국의 권력이 강해서 몇몇 거대 기획사를 제외하면 동등한 입장에서 방송국을 상대할 수 없는 상황인데, 그것도 20대 초반 어린 가수가 직접 방송국을 향해 복장 규제를 하면 출연을 안 하겠다라든가, 코미디 프로그램 출연을 강제하면 안 나가겠다고 선언한다는 것은 지금 기준으로도 괘씸죄로 찍히기 쉬운 일이었다. 그래서 당시 활동하던 댄스 가수들은 서태지와 아이들 덕분에 자유로운 스타일링이 가능해졌다고 고마워했다.

활동 후 잠적, 공백기를 가진 이후 다시 컴백이라는 이른바 '휴식기'라 불리는 현재의 대다수 아티스트, 아이돌의 활동 패턴의 시초이기도 하다.

이전에는 컴백, 휴식기 같은 개념이 없었다. 특히 트로트 가수들은 한 번 신곡을 내면 몇 년 동안 쉬지 않고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1996년경까지만 해도 가수들의 활동 기간은 굉장히 길어서, 가을에 나온 노래가 이듬해 여름까지 TOP 10을 폭격하는 경우가 잦았다. 심지어 노래의 인기가 식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송사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가수도 있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게, 당시로서는 감히 PD의 명을 거슬러 활동하지 않는다는것은 있을 수 없거니와, 가수로서도 몇개월 사이 잊혀질수 있다는 공포가 있었다.
당시에는 통신수단도, 교통수단도 불완전했기 때문에 가수가 활동을 중단하고 TV에 나오지 않으면 팬들로서는 정말로 그 가수가 '증발' 해 버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스스로 음악을 완전히 만들어야했던 서태지였고, 또 그만큼 인기가 많았기에 가능했던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1집 이후 서태지가 이런 행보를 선택했을때, 걱정 하는 사람들도 많았었고 '서태지 은퇴 발표'로 기사가 나기도 했으며, 심지어 '사망설'과 같은 헛소문이 돌아도 팩트 체크가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결국 중간에 "이밤이 깊어가지만" 뮤직 비디오를 제작하여 홍보하는등 징검다리 같은 행보를 보여주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2. 4. 데뷔해서 1996. 1. 은퇴기자회견으로 해체했으니 채 만 4년도 활동하지 않은 것이지만, 그 사이 앨범은 4장을 냈고, 대형 콘서트에도 수 차례 참여했으니 지금 기준으로는 꽤 부지런히 활동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고 지금 기준으로는 '이게 신비주의인가?' 싶을지 모르겠지만, 당시로서는 그 짧은 공백기간의 의미조차도 지금과 매우 달랐다. 지금이야 SNS를 통해 가수의 활동 정보가 활발하게 공유되고 사진 공유도 어렵지 않겠지만, 당시에는 가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수단은 TV와 잡지에 실린 사진 몇장, 정말로 천운을 타고나야 가 볼수라도 있는 콘서트가 전부일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활동을 마치고 TV와 라디오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가, 몇 달만에 갑자기 '컴백'을 해서 지난 앨범과는 전혀 다른 콘셉트와 의상으로 '짠'하고 나타나는 모습은 당시 학생 팬들에게는 경이로운 수준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레게머리나 염색, 스쿨 룩 패션(1집), 힙합 패션(2집), 치마 패션(3집), 스노우보드 패션(4집) 등 매 앨범마다 음악에 따라 다른 컨셉이라는 시도, 또 이후 연예계에 일반화된 전속 코디네이터 제도의 도입이라든가, 많은 자본이 들어간 뮤직비디오의 질적인 향상[] 등등...90년대 이후의 가요계 뿐만 아니라, 사회 다방면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가요계 트렌드를 재편하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한국의 대중가요계는 성인가요와 발라드 위주에서 10대~20대 취향의 댄스 음악 위주로 재편되었으며, 노이즈, 듀스, DJ DOC, 룰라와 같은 댄스그룹들이 점점 등장하게 되었다.

댄스 음악의 등장은 이후 테크노로의 발전까지 이어지며 1990년대는 대한민국 대중음악 사상 가장 많은 장르가 공존하였으며 가장 빠른 발전을 맞이한 시대가 되었다. 또한 격렬한 안무, 각 멤버의 캐릭터 기믹 부여, 립싱크[]등 현재 한국 아이돌의 기원이 되는 많은 시스템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을 시작으로 한 후세대의 댄스 가수부터 본격 시작되었다.

 

기성세대와의 갈등

3집부터는 단순한 음악적인 시도를 뛰어넘어 사회문제에 대한 곡을 써내려가며 사회적, 문화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치기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문화대통령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현재 최고의 자리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말 그대로 가요계의 끝판왕이 갑자기 노선을 바꾸어 사회적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기에 이는 당연히 파장이 컸다. 통일을 노래한 '발해를 꿈꾸며'까지는 다들 긍정적인 모습으로 보았지만, 대한민국 교육 현실을 강하게 비판하는 노래인 '교실 이데아' 활동이 시작되자 매스컴과 기성세대, 높으신 분들은 그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 시작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민중가요라는 사회 비판적인 가요가 대학가나 시위현장에서 많이 불려졌기는 했고, 김광석이나 양희은 같은 유명가수들도 민중가요를 불렀기는 했지만 1990년대 중반 기준으로는 청소년 취향의 음악은 아니었는데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은 청소년 취향에 맞는 음악이면서도 파급력이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즉, 최신음악에다가 민중가요적인 색채를 어느정도 혼합한 시도였었는데 이것도 히트를 치면서 불편해진 기성세대가 많아지게 된것.

3집의 이러한 시도는 대중성을 많이 포기한 대신, 충성스러운 매니아 팬들을 결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작 서태지와 아이들은 파격적인 음악(락)과 가사로 인해 3집 당시 방송 금지를 받았고, 사실상의 3집 활동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지상파가 거의 유일한 홍보 수단이었던 시기 그 당시에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으나, 이것은 오히려 서태지와 아이들, 특히 서태지가 뮤지션으로서 영원할수 있는 큰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대중은 다른 가수들, 10대·20대 가수들에게도 음악성과 함께 비판적인 가사 등을 다루어 줄것을 요구, 또는 비교 하게 되었다. 오히려 서태지가 절정의 인기를 구가 하던것은 사회적인 메시지를 구가 하지 않은 1, 2집이었음에도,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 이후 대중이 서태지를 기억하던 시각은 인기와는 별개였던 것이다.

이것은 90년대 아이돌 그룹들이 사회 비판적인 노래를 부르는 데까지 영향을 준다.[] 4집의 타이틀곡이었던 'Come Back Home' 같은 경우, 그 곡을 듣고 가출을 했던 청소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뉴스까지 나왔을 정도. 이후 이 앨범의 일부 수록곡들의 가사 문제로 판매가 금지된다는 얘기가 나오자 가출 청소년들의 부모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판매 금지가 부당하다는 시위를 하기도 했다.

이는 심지어 21세기 아이돌인 방탄소년단의 음악적 행보에도 영향을 주었다. 후술하겠지만, 실제로 외국의 케이팝 전문 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언급하는 부분이다.

그 당시 신문, 방송들을 보았을때, 심지어 서태지를 다룬 인간시장에서도 지금으로서는 상당히 단순한 서태지의 랩음악에 대하여 파괴적이고 위험하다라며 적개심을 드러 내었는데, 당시 언론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과 행보에 긍정적이지 않았다. 매 앨범, 컴백 마다 달라지는 음악과 패션등에 대하여 머리색깔, 의상, 음악 스타일, 가사 등을 문제 삼으며 집중 포화를 쏟아 내었다. 참고로 1990년대는 신문이 구독률 70%에 육박하던 시절로 영향력이 대단했고 3대 방송사들도 광고시장의 성장에 따라 매년 매출액 신기록 달성을 하던때였으며 그나마 대항매체라 할수있는 PC통신은 비싼 요금과 느린 속도로 파급력이 미약했는데 역설적으로 이러한 불리한 상황속에서도 사회에 울림을 주는데 성공했다는 점에 있어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위상이 어느정도로 대단했는지 알수있다.

언론이 띄워줬기에 성공한 것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이 틀린 이유다.[] 이는 2000년도 이후, "한류", 또는 "K-POP"의 선봉으로 개인적인 처신 문제외에 큰 제약을 두지 않고 오히려 "국위선양"의 이미지 까지 가지고 가는 현재의 아이돌 활동과는 천양지차로 다른 것이다.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이 활동했을때와 K-POP이 세계적으로 흥행했을때랑은 언론의 위상이나 세계적인 파급력에 있어서 환경이 천지차이로 달라진것도 감안은 해야 할 것이다.

한편 이러한 현상은 2000년대 중반 ~ 2010년대에도 똑같이 발생했다. 2007년 원더걸스의 Tell me가 대히트하며 한국 음악계는 아이돌들이 점령[]하게 되었는데, 일부 기성세대들은 아이돌들을 못마땅하게 여겨 한국 음악은 망했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주된 레퍼토리는 '외모로만 뽑혀서 실력이 없다'[], '립싱크하느라 입만 벙긋벙긋하는 것들이 무슨 가수냐'[], '다 똑같이 생겨서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 '떼거지로 몰려나온다'[] 등등이었는데, 악플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생기기 이전이라 당시 아이돌들은 엄청난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한류의 핵심 동력은 드라마[]도, 게임도 아닌 케이팝이었고, 케이팝이 인기있는 이유는 아이돌이었다. 기성세대가 그토록 바라던 한국 문화의 세계화는 그들이 사랑하는 '진짜 가수'가 아니라 아이돌들이 이루어냈다. 그리고 빌보드 주간 차트 1위를 찍은 가수는 나훈아가 아니라 방탄소년단이었다. 아이돌을 그렇게나 비난하던 기성세대들이 방탄소년단의 성과를 보고는 180도 태도를 바꿔 '케이팝의 훌륭함'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덤이다.

비틀즈마저도 초창기에는 기성세대의 미움을 받았던 사실을 생각해보면, 대중문화의 흐름은 10~20대가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비틀즈를 들으며 자랐던 세대들이 서태지를 비난하고, 서태지를 좋아했던 세대들이 아이돌들을 비난한 것이다.

 

 

해체 은퇴

1996년 1월 중순, 4집의 가사, 이데올로기 등에 대한 온갖 탄압을 견디며 제2 활동곡인 <필승> 라이브를 뚝섬에서 마친 서태지와 아이들은 갑작스럽게 완전히 잠적하였다. 잠적 후 팬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뉴스에서 다뤄질 정도로 논란이 있었고, 멤버들이 죽었다는 설이 파다하게 나도는 등등 며칠간 굉장히 큰 소란이 일었다. 그리고 얼마 후...

1996년 1월 31일, 성균관 유림회관 기자회견장에서 서태지의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보여 주었다"라는 말 한 마디로 서태지와 아이들은 은퇴한다. 전국의 초, 중, 고, 대학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와 허탈감에 빠졌으며 심지어 3대 방송사 9시 뉴스의 메인으로 소개되었다.# 이 때문에 한때는 조직폭력배가 은퇴에 개입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했을 때 대중들의 반응은 현재 현역으로 활동하는 아이돌 가수들의 팬들만 아쉬워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청소년들의 영원한 우상이라고 불리던 인기 최정상의 아이돌 그룹이 어느날 갑자기 뜬금없이 은퇴 선언을 했기 때문이다.

이 서술의 내용이 단지 서태지와 아이들을 띄우기 위해서 말하는 것도 아니고, 과장을 조금 덧붙여서 거짓말이 아니라 대한민국 대통령이 하야했다는 반응과 거의 비슷했을 정도로 대한민국의 10~20대 정도의 학생들은 너 나 할것 없이 모두 다 큰 충격에 빠졌으며 "사실상 대중가요계가 텅 비었다"는 반응이 나왔을 정도였다. 심지어는 당장 1년 전에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보다도 그 실질적인 임팩트는 컸다. 은퇴가 확정된 것이 아닌 발표만 났던 1월 20일~30일 사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이야기는 학교 아이들 간 최고의 소재였다.[]

심지어 골수 여학생팬들은 해체를 반대한다면서 매일마다 서태지의 소속사나 집 앞에서 시위를 벌였을 정도였다. 일부는 집에 담넘어 들어가 서태지가 사용한 물건을 가지고 나오기도 했다. 이 때 각 일간신문 사회면에서는 "X세대, '집단 히스테리' 증상", "난장판이 된 서태지 집 앞", "오빠부대 '집단 히스테리' 증상", "자살도 불사하겠다", "서태지의 결혼/은퇴에 대비해 300여 명 자살 클럽 결성설" 등지의 제하를 달아 보도했다.

당시의 증언을 빌리자면, 나이어린 초등학생들 고학년 사이에서도 도대체 왜 해체하는데? 라는 말밖에 안 나왔다. 초등학생들도 저학년들은 시끄럽고 알 수 없는 노래를 한다고 싫어하는 친구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고학년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을 싫어하는 반응은 거의 없었다. 형, 누나, 언니, 오빠들이 매일마다 서태지의 음악을 들었고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어서 만화를 보면서도 지상파 음악방송 할 시간에는 당연히 채널을 돌리니까 노래 들으면서 랩 열심히 연습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막 나타났던 M.NET, MTV에서 서태지와 아이들 노래는 정말 지겹게 흘러나왔다.[] 초등학생 고학년 정도라면 서태지와 아이들은 늦게나마 듣고 자랐기 때문에[] 싫어하지도 않았고 무대에서의 퍼포먼스는 멋지게 느껴졌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 세대는 H.O.T.와 젝스키스의 데뷔를 보면서 1세대 아이돌을 응원하는 중심세력이 된다.[]

이런 이유로 앞으로도 아이돌 가수들이 은퇴를 했을 때 "서태지와 아이들처럼 큰 충격을 받는 대중들의 반응은 앞으로도 나오기가 어려울 것이다"라는 의견도 있었고, 조정선 MBC 라디오 PD도 <MBC 가이드> 1997년 3월호 기사에서 서태지에 대해 긍정적이었으나 그가 떠난 자리는 비슷한 패턴을 지닌 랩 댄스 음악으로 황폐해졌다고 하면서 "서태지의 음악이 과연 혼자만의 음악이 아닌, 대중음악의 다양성에 기여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 조윤진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광팬으로 나오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을 정도로 시대 고증에 너무 잘 맞았고, 골수팬들의 충성도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극 중에서 조윤진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하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아예 식음을 전폐하자 삼천포가 못내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왔을 정도로 골수팬들의 반응은 거의 다 그랬다.

 

근황

서태지는 미국으로 떠난 후 1998년 5집을 발매한다. 이후 2000년 6집 발매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솔로 서태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서태지컴퍼니를 설립해서 NELL, Pia를 발굴해냈으며 서태지컴퍼니 소속 밴드들이 모두 독립한 뒤에는 2004년 7집, 2008~2009년 8집, 2014년 9집을 내며 본인의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하지만 아티스트로서 훌륭한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는 서태지와는 달리 나머지 2명은 온갖 범죄행위를 벌여오면서 서태지 덕분에 쌓아온 이미지를 모조리 날려먹게 되었다.

양현석은 처음에는 연예 기획 사업가로 대성했으며, YG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해서 본인의 솔로 1집을 낸 뒤, 킵식스, 원타임, 지누션의 육성을 시작으로 거미, 휘성, BIGBANG, 2NE1, 위너, 아이콘, 블랙핑크 등 수많은 뮤지션을 육성했다. 그 덕분에 본인은 이수만, 박진영과 같은 연예계 최정상의 제작자들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수준까지 올랐으나 최고의 인기 그룹의 대형사고와 자신이 주최한 데뷔 오디션 프로그램 믹스나인에서의 온갖 악행들과 해당 프로그램에서 데뷔하게 된 유닛의 데뷔를 말 그대로 묵살내버리는 행동을 보이고 있어서 이미지가 급추락 중이었고,[] 급기야 버닝썬 게이트과 마약 및 성매매 알선의혹이 터지면서 더 이상 연예기획사가 아닌 범죄조직 수장으로서의 활동에 매진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현재는 자신의 회사를 나와 잠적한 상태이다.

사실 애초에 서태지도 양현석이 구제할 수 없는 사람 임을 깨닫고 멀리하기 시작했는지 서태지와 양현석은 서로의 활동이 진행될수록 어째 점점 사이가 멀어져 갔다. 양현석은 서태지와 마지막으로 언제 만났는지를 기억도 하지 못하더니 모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팀명을 서태지와 아이들로 정한 사람을 죽이고 싶었다"는 정신 나간 악담을 퍼부으며 더 이상 같은 그룹 관계가 아닌 철천지 원수지간이 되었다.

다만, 이것은 서태지 한 명을 대놓고 지적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태지보이스" 로 이름을 붙였는데 멋대로 서태지와 아이들로 한글 번역으로 나오게 만든 방송사를 욕하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게다가, 자신에게 큰 명성을 안기도록 도와준 서태지를 어느 날 갑자기 뜬금없이 양현석이 대놓고 적대시하는 태도로 나오는 것도 뭔가 이상하기도 하다. 게다가 사이가 정말로 좋지 않았다면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부터 서태지나 양현석의 주변에서 불화설이 지속적으로 나왔어야 된다.

이주노는 1996년부터 제작자로 활동하면서 아이돌 댄스 그룹 영턱스클럽을 인기 가도에 올려놓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후 솔로로 활동한 임성은, 그룹 익스트림 스파이 등은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이후에는 간간히 TV에 출연하며 안무가, 무용가로서의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었지만, 이 사람 역시 가정폭력, 성폭력, 사기 등 온갖 범죄행위로 몰락해버렸다.

공교롭게도,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 모두 나이차가 엄청난 연하의 신부를 맞이했다. 서태지는 신부와 16년 차이이며, 양현석은 띠동갑 차이, 이주노는 위에 거론되었듯이 무려 23살 차이다. 총합 51년 차이이며 평균으로 따지자면 17년 차이가 된다. 허나 이주노는 2015년 사기혐의로 피소되었고 2016년에는 성추행 혐의로 피소되어 상황이 좋은 편은 아니다.

덕분에 현재로는 사실상 서태지만 조용하고 깔끔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상황이며[], 나머지 2명은 위에도 거론했듯이 상황이 가장 좋지 않은 상황이다. 이 때문에 현재 사람들은 해당 그룹은 사실상 서태지 혼자만 감당해왔던 그룹이라면서 그냥 그룹 이름을 "서태지" 내지 "서태지와 그 새끼들"로 취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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